트래블 레지스탕스 노동효가
대한민국의 샛길에 바치는 오마주
『길 위의 칸타빌레』 저자 노동효의 두 번째 샛길 여행
■ ■ ■ 지도가 필요 없는 대한민국 샛길 여행 보고서
첫 저서였던 『길 위의 칸타빌레』로 지금 당장, 계획 없이 떠나는 여행 예찬론을 펼쳤던 여행 작가 노동효가, 이번에는 ‘로드 페로몬’을 쫓는 두 번째 샛길 방랑기를 펴냈다.
저자가 만들어낸 독특한 개념인 ‘로드 페로몬’은 알려지지 않은 채 은둔하는 우리나라의 숨은 절경들이 뿜어내는 참을 수 없는 매혹의 체취다. 자칭 ‘트래블 레지스탕스’인 저자는 이번에도 정해놓은 목적지 없이 오직 이 로드 페로몬에만 몸을 의지하여, 물 흐르듯 자연스레 발길 닿는 대로 대한민국의 곳곳을 떠돈다. 그렇기에 더욱 생생한 그의 이야기는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저절로 가슴에 남아버리고, 여기에 더해 그의 문학적 소양을 엿볼 수 있게 적재적소에 배치된 풍부한 시와 문구들은, 바로 지금 이 순간 그와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듯한 기시감을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 ■ ■ 언제나 당신의 삶을 살길 바랍니다
아무도 모르는 어느 절경의 깊숙한 곳에서 풍기는 피할 수 없는 로드 페로몬 향에 이끌려 핸들을 꺾은 곳에는, 때로는 죽어도 여한이 없을 풍경들이 펼쳐졌고, 때로는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이 열렸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통해 저자는 수많은 여행 마니아들이 자신의 정처 없는 혈통을 잡기 위해 붙인 보헤미안이니 히피니 집시니 하는 그 숱한 관념들을 내려놓는 법을 깨달았다.
천 개의 베개를 갖고 태어났다는 저자는 어려서부터 낯선 곳에서 잠자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으며, 열다섯 살의 크리스마스에 첫 가출을 감행한 이후로 아직도 천 개의 베개를 채우기 위해 길 위를 떠돈다. 책 한 권 달랑 들고, 길을 제대로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못 들기 위해 떠나는 여행. 그리고 지구라는 별에 패키지여행을 온 것처럼 남들 사는 대로 살기 바쁜 사람들에게 항상 ‘자신의 삶’을 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금지된 곳을 탐하며 삶에서 후회와 미련을 남기지 않는 법을 배우고, 계획 없는 여행을 통해 오늘, 바로 이 순간의 소중함을 절감하는 삶이 ‘그 자신의 삶’이라고 말한다. 그런 그의 발자취를 조용히 따라가다 보면 누구라도 잊고 지냈던 삶의 여유와 휴식의 충만함을 되찾게 될 것이다.
■ ■ ■ 후천성 샛길 증후군 환자의 초대
스스로를 ‘후천성 샛길 증후군 환자’라 칭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삶 역시 정해진 코스가 아닌 정해지지 않은 코스대로 흘러왔다. 대학 시절부터 범상치 않은 글재주로 이름을 날렸지만 무작정 떠난 영국에선 뱃길을 떠도는 선원이 되었고, 어쩌다 보니 비행기 한 번 타지 않고 그렇게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해서 귀국하기에 이른다. 그의 다음 저서가 바로 이 유라시아 횡단기라고 하니, 기대해봐도 좋을 듯하다.
저자는 이 책 곳곳에 후천성 샛길 여행 증후군의 씨앗들을 뿌려놓고 독자들의 감염을 기다리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이 『로드 페로몬에 홀리다』인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저자가 그랬듯이 여러분도 지금 당장, 로드 페로몬 향을 쫓아 어디론가 훌쩍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 ■ ■ 노 동 효 D. H. RHO 잭 케루악을 흠모하는, ‘총’과 ‘칼’ 대신 ‘펜’과 ‘여행’으로 세상을 뒤엎고 싶은 트래블 레지스탕스(Travel Resistance).
기형도 시인이 ‘남한에서 가장 활기찬 도시’라고 일컬었던 부산에서 태어남. ‘크리스마스에도 악마는 태어난다’는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의 한 구절처럼 만 15세 크리스마스에 집을 나가 홀로 떠돌다 돌아옴. 한양대 영문학과에 입학, ‘포엠 퍼포먼스(Poem-Performance)’를 기획․연출하고, 노학연대(勞學連帶) 밴드 ‘게토(Ghetto)’를 만들어 기타를 치며 푸른 스물을 보냄. 휴학 후 런던으로 건너가 템스 강을 오가는 유람선 선원이 되었다가 1년간의 영국 체류 생활을 마치고 수로와 육로만으로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횡단, 인천항으로 귀국. 졸업 후 인터넷 방송, 엔터테인먼트 업종에 종사하며 샐러리맨으로 지내다가 불현듯 회사 생활을 접고 길 위의 여행자가 됨.
그 후 길 위에서 보낸 날들을 개인 블로그 ‘밤이면 삐노가 그립다(http://blog.paran.com
newcross72)’에 업데이트하던 중, 민예총의 컬처뉴스 담당자 눈에 띄어 「길 위에서」란 칼럼을 연재하는 한편, 사회철학자 에릭 호퍼와 폴 발레리의 영향으로 한국목조건축학교에 입학, 건맨(목수)이 되어 제주도, 속리산, 팔공산에서 목조 가옥과 목조 펜션을 지으며 이 땅의 산천을 떠돎. 현재 한겨레신문에 「독서광 노동효의 썸플레이스」를 연재 중이며 저서로 『길 위의 칸타빌레』가 있다.
프롤로그
후천성 샛길 증후군 환자를 위하여
1장 _ 다성애자의 사랑법
다성애자의 사랑법 1
길과 연애하는 여행자
다성애자의 사랑법 2
홍천에서 양양 가는 길에 만난 비밀의 햇볕
다성애자의 사랑법 3
천 개의 베개, 하나의 길
다성애자의 사랑법 4
지금은 잊힌 국도를 위하여
다성애자의 사랑법 5
요한복음 2장 16절과 적멸보궁
2장 _ 북쪽으로 튀어!
북쪽으로 튀어! 1
해운대에서 길을 떠나다
북쪽으로 튀어! 2
장기반도를 에둘러 세상의 끝으로
북쪽으로 튀어! 3
천 년의 밤을 보냈던 청송으로 가는 길
북쪽으로 튀어! 4
죽어도 여한이 없을 길들의 풍경
북쪽으로 튀어! 5
내 젖은 팬티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3장 _ 오지여, 어디 있는가
오지여, 어디 있는가 1
정든 님, 또는 발원지를 찾는 연어
오지여, 어디 있는가 2
X와 Y, 여기 왔다 가다
오지여, 어디 있는가 3
초현실과 3억 년의 고독을 지나 승부를 보시겠습니까?
오지여, 어디 있는가 4
내 우상의 무덤으로 가는 길
오지여, 어디 있는가 5
벗이여, 행복한 여행길이길!
4장 _ 훔쳐보는 풍경
훔쳐보는 풍경 1
그대 마음의 삼포, 사방거리 -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산양리
훔쳐보는 풍경 2
밤 11시 59분 45초 – 재인 폭포를 찾아서
훔쳐보는 풍경 3
바람이 묻어준 이야기 – 숲 속의 음악회
훔쳐보는 풍경 4
우린 이 행성을 그저 스쳐 지나갈 뿐 – 월악산 하늘재를 지나며
훔쳐보는 풍경 5
필리핀 열대우림에 폭설이 내린다면 – 35번 국도의 설경
에필로그
문풍지 구멍 너머로 훔쳐보던 풍경
■ ■ ■ 후천성 샛길 증후군 환자를 위하여
- 다들 겁먹어서 이류 모텔에도 못 들어갔잖아. 우리가 그렇게 위협적인가?
- 너한테 겁을 먹은 게 아니라 네게서 보이는 것에 겁을 먹은 거야.
- 그래 봤자 머리 좀 기른 것뿐이잖아?
- 그게 아냐. 그들은 네게서 자유를 본 거지.
- 영화『이지 라이더(Easy Rider)』중
나의 이니셜은 R, 직업은 여행작가, 성 정체성은 다성애자로 후천성 샛길 증후군을 앓고 있다. 그리고 샛길은 ‘물리적인’ 샛길일 때도 있고 ‘정신적인’ 샛길일 때도 있다.
내가 왜 ‘후천성 샛길 증후군’ 환자인지는 『로드 페로몬에 홀리다』를 읽는 동안 다양한 임상 사례들을 접하며 그 연유를 짐작할 수 있을 텐데, 영어로는 ‘Acquired Byroad Syndrome’이라고 부른다.
물론! 세계보건기구(WHO)의 질병 분류에 그런 병명이 등재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세계보건기구의 질병 분류 코드에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병’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후천성 샛길 증후군이 언제 WHO 질병 분류에 등재될지는 알 수 없지 않겠는가.
후천성 샛길 증후군이 발병한 시기는 내 나이 열네 살, 어느 날의 하굣길이었다. 길동무가 물었다. “너 장기 둘 줄 아니?”, “응, 이모부한테 배웠어.” 무심코 대답하고 나서 나는 (정신적) 샛길로 빠져 여러 해 동안 이모부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을 떠올렸고, 이어 이모부가 몇 년 전 돌아가셨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 순간 나는 내 생애 처음으로 영화나 소설이 아니라 내 곁에도 죽음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나를 둘러싼 세계가 완전히 달라져버렸다.
인간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유한한 존재였다는 것. ‘난 왜 태어난 것일까? 그리고 나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말하자면 사춘기가 시작된 것이다.
물론 누구나 겪는 ‘사춘기’를 ‘후천성 샛길 증후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런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서 내가 내린 결론이 ‘여행을 떠나야겠다’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나는 하루키의 소설 『해변의 카프카』의 주인공, 카프카처럼 열다섯의 어느 날 정신적 탯줄을 끊고 길을 떠났다. 일컬어, 가출(家出). 물론 ‘열다섯 살의 생일’은 가출하기에 안성맞춤의 시기라고 말하는 카프카와는 달리 ‘열다섯 살의 크리스마스’에 가출을 하긴 했지만 말이다.
15세 소년에게 이 나라는 무수한 도시들로 가득한 미로였고, 산과 강들이 즐비한 대륙이었으며, 실핏줄처럼 이어진 길들로 가득한 생명체였다. 15세 소년소녀들의 일상에서 벗어나 (물리적) 샛길로 빠진 나는 버려진 방범 초소에서 잠들기도 했고, 지리산에선 MT 온 대학생들과 함께 어울리기도 했고, 낯선 집 대문을 두드려 하룻밤을 재워달라고 청하기도 했으며, 겨울 강변에 장작불을 지피고 밤을 지새기도 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이미 로드 페로몬(Road Pheromone)에 홀린 후천성 샛길 증후군 환자가 되어 있었다.
후천성 샛길 증후군은 고요히 잠복을 하고 있다가 바람 부는 날, 나무 이파리들이 바람에 뒤집히는 모습을 보게 되거나 할 때면 어김없이 발병했다. 숲은 푸른 혓바닥을 내밀어 내 눈알을 핥아댔고, 나는 달아올랐고, 견딜 수 없을 때면 길을 떠났다.
물론 잠복기가 꽤 길었던 시절도 있었다. 검은 양복을 입고 빌딩 사무실에 앉아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펜대를 굴리던 시절. 식사를 하고, 회의를 하고, 영화를 보고, 연인과 사랑을 나누고 있을 때, 또 다른 내가 거실의 TV 앞에 앉아 저녁 뉴스를 보고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시절이었다. 사무실 인근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나와 자판기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노라면, 내가 나인지 커피를 뽑고 있는 저 양복 입은 사내가 나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마치 『매트릭스(The Matrix)』의 무한 복제된 스미스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그때 다시 발병한 후천성 샛길 증후군은 ‘질병’이 아니라 ‘구원’이었다. 후천성 샛길 증후군은 나를 기차선로처럼 한쪽 방향으로만 달리고 있는 Korean Express에서 샛길로 끌어냈고, 나는 그때부터 샛길 방랑자가 되었다.
바람에 나뭇잎이 뒤집힐 때면 나도 어느 한쪽으로 뒤집혀 깊이를 알 수 없는 길들 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가, 사람들이 이제 소용없다고 버린 것들을 내 몫의 지문으로 움켜쥔 채 떠올랐다. 길들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태어나기도 하고 죽기도 하니까, 이 땅은 다시 은둔하는 절경들을 감춘 미로가 되고, 수많은 산과 강과 바다를 품고 있는 대륙이 되어주었다.
그 길 위에서 여러 여행자들을 만났는데, 그중에는 여행길에서 무엇을 타고, 어디에서 자고, 어느 식당에 가서 무엇을 먹고, 어디에서 무엇을 볼지 모든 것을 정해놓아야 안정이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난 그들이 ‘숙제’를 하러 온 것인지 ‘여행’을 하러 온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어리둥절해지곤 했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꼼꼼한 ‘정보’나 빈틈없는 ‘일정’이 아니라 여행을 대하는 ‘자세’이고, 여행의 정수는 예측할 수 없는 만남과 모험에 있는 것. 그것은 결코 차질 없이 처리해야 할 숙제가 아니니까.
삶이 여행이고 여행이 곧 삶이듯, 삶과 여행이 아름다운 건 ‘불확실성’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꼼꼼한 계획에 따라 예정대로 착착 진행되는 여행이란 ‘박제된 동물’을 관람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물론 박제된 동물의 앞태, 뒤태, 옆태, 발톱과 털의 생김새 등등을 세심하게 들여다볼 수는 있겠지. 그러나, 그곳에 ‘생명’은 없다.
내가 샛길 증후군을 ‘후천성’이라고 하는 까닭은 이 병이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누구나 이 병에 감염될 수 있으며, 언제라도 ‘ 샛길 증후군 환자’가 될 수 있다.
그대가 혹시 Korean Express에 올라타고 있다면 잠시 내려 샛길에서 자유의 향기를 맡아보지 않겠는가. 삶은 한쪽 방향으로만 뻗은 기찻길이 아니라 여러 갈림길로 얽혀 있는 거미줄이며, 세상엔 360도 어느 방향으로든 제 나름의 샛길들이 무한정 존재한다는 것을 느껴보지 않겠는가.
나는 이 책 곳곳에 후천성 샛길 증후군의 씨앗들을 뿌려놓았다. 부디 그대가 감염되길 바란다. 하여 샛길로 떠난 그대의 삶이 더욱 풍성해지고, 샛길에서 돌아온 그대의 삶이 더욱 행복해지길!
2009년 초여름 R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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