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도서이벤트

[스크랩] 내 인생의 첫 수업 (두리미디어) 25

by 칠면초 2009. 9. 29.

 

 

사회 디자이너 52人이 전하는 삶의 터닝포인트

 

 

내 인생의 첫 수업

 

 

【차례】

1부-희망을 말해주던 인생의 스승들

 

1. 스물에 만난 그의 질긴 삶 (홍세화 한겨레신문 기획위원) *

2. ‘사람대접’을 받은 그 기억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3. ‘소도둑놈’ 선생님의 혼이 깃든 가르침 (정찬용 (사)인재육성아카데미 이사장) *

4. 교도소에서 만난 사람들 (김제선 사단법인 풀뿌리사람들 상임이사)

5. 어머니가 받고 있는 수업 (고은광순 한의사) *

6.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배병삼 영산대학교 학부대학 교수)

7. 내 이름에 얽힌 의미 (김금옥 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처장) *

8. 데모 못하는 대학은 삼류? (송재봉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 사무처장)

9. 앎의 허기 채워 준 벽안의 스승 (서순탁 서울시립대학교 도시행정학과 교수) *

10. 삶의 화두가 된 친구의 충고 (권미혁 한국여성민우회 상임대표)

11. 사회에 대한 책임 (김혜경 지구촌나눔운동 사무총장) *

12. 유일한 묘소에서 얻은 깨우침 (김영호 유한대학 총장)

13. 유머의 힘을 느꼈다 (나효우 아시안브릿지 운영위원장) *

14. 학자의 길을 알려주다 (조명래 단국대학교 도시지역계획학과 교수)

 

 

2부-시대와 역사가 나에게 다가왔다

 

1. 유학생활 중의 그 다짐 (정범구 전 국회의원) *

2. 중대장의 눈물 (이지문 전국민주공무원노조 정책연구원) *

3. 역사로 남아버린 인생수업 (김주언 시민사회신문 편집인) *

4. 부모를 기다리던 단칸방 아이들 (이은애 실업극복국민재단 사무국장)

5. ‘여자 공원’에서 ‘여성 노동자’로 (최순영 민주노동당 최고위원) *

6. 동일방직 노동자와의 만남 (남윤인순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

7. 군홧발 아래서 배운 민주주의 (이학영 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 *

8. 삶의 동력이 된 동지애 (배옥병 학교급식전국네트워크 상임대표)

9. 피 흘리던 현실과의 만남 (권영국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인권현안대응팀장·변호사) *

10. 촛불의 바다, 무대에 오르며 (노정렬 방송인) *

 

 

3부-실천과 배움을 나누며 함께 꾸는 꿈

 

1. 고난의 수업은 계속 된다 (박원순 변호사) *

2. 전혀 다른 의미의 기억 (정진화 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위원장)

3. 막걸리 기울이던 어색한 그 자리 (박병상 인천도시생태·환경연구소 소장) *

4. 농촌학교 지키기의 추억 (전성환 한국YMCA전국연맹 기획실장)

5. 부족함속에서 얻는 깨달음 (김혜애 녹색연합 녹색교육센터 소장) *

6. 본전 뽑고도 남은 수업 (김언경 전 민주언론시민연합 협동사무처장)

7. 공감하기와 구별 짓기 (오성규 환경정의 사무처장)

8. 아토피를 앓는 아이들 (박진섭 생태지평 부소장)

9. 백혈병에서 살아남기 (강주성 전 건강세상네트워크 대표) *

10. 나눌 수 있는 마음들 (위정희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기획실장)

11. 후회없는 최고의 선택 (이화영 서울여성의전화 가정폭력상담센터 국장) *

12. 아픔이 있었다 (이호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소장)

 

 

4부-삶은 나에게 새로운 깨닮음을 전한다

 

1. 아직 갚지 못한 인생의 빚 (김성훈 환경정의 이사장·전 농림부장관) *

2. 가난한 이웃으로 온 예수 (문창식 간디문화센터 대표) *

3. 의지와 신념으로 버틴 광기의 시간들 (이상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기획국장) *

4. 걸쭉하던 택시기사들과의 연대 (박세길 전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부원장)

5. 그 더운 여름날의 수업 (김성인 광주 참여자치21 대표) *

6. 농활서 먹은 감자의 기억 (이유정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과거사위원장·변호사)

7. 모방 아닌 창조가 대안이다 (조희연 성공회대학교 통합대학원장) *

8. 산골서 찾은 강호제현의 한 수 (곽노현 한국방송통신대 교수)

9. “자네는 유학을 가게나” (김남근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장·변호사) *

10. 검은 골목들의 기억 (지금종 전 새진보연대 대변인)

11. 부끄럽지 않게 살기 (오관영 함께하는시민행동 사무처장) *

12. 가슴 시린 청춘의 흔적 (김성희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13. 복사꽃이 부르는 노래 (남효선 시민사회신문 전국본부장) *

14. 학문의 길로 이끈 총학생회장 낙선 (이장희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15. 새로운 수업을 기대하며 (최승국 녹색연합 사무처장)

16. 인생수업의 중간 성적표 (이승희 경제개혁연대 사무국장)

 

 

스물에 만난 그의 질긴 삶

 

홍세화 한겨레신문 기획위원

 

사람에게 분노하는 대신 그런 사람을 낳는 사회에 분노하고, 그래서 그 사회와 싸우고, 또 나와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 그의 신산한 삶

갓 스물 나이에 그분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그저 평범한 ‘범생’이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고등학교에서 영어보다 수학을 더 잘하던 나는 당시 유행을 따라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했다.

그분을 만나지 않았다면 내 삶은 대충 주식투자하고, 부동산 재테크를 하거나 자식 학군을 바꾸려고 대충 위장전입도 하고, 때때로 골프도 즐기는, 시쳇말로 잘 먹고 잘 사는 부류에 속하게 되었을까? 알 수 없다.

그분을 만났기 때문에 리영희 선생의 글이나 C. 라이트 밀즈의 ≪들어라 양키들아≫를, 사르트르와 카뮈를 읽게 된 것일까? 전태일의 삶과 죽음에 관해 알게 된 것도 그분을 만난 인연 때문일까? 알 수 없다.

그분을 만나지 않았어도 리영희 선생의 글과 ≪들어라 양키들아≫와 사르트르, 카뮈를 읽었을 수도 있고, 전태일을 알았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스무 살에 그분을 만난 게 30대 초반 프랑스 땅의 망명객으로 귀착되는 내 인생의 첫 변곡점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부역자 홍 씨의 대한민국

 

여섯 살, 세 살 나이에 한국을 떠난 두 자식이 다닌 프랑스 학교 교문마다 ‘자유·평등·박애’라고 적혀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상념에 젖던 것도 그분을 만난 인연과 무관하지 않다. 내가 그분을 만나지 않았고 망명객이 되지 않았다면 프랑스 학교 교문마다 청·백·홍 삼색기로 표현되는 프랑스 공화국의 국가 이념인 자유·평등·박애의 세 글자를 새겨 놓은 것을 눈여겨보지 않은 채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내가 그 세 글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아! 이들은 긍정적인 가치를 가르치는 구나”라고 한탄인지 탄복인지 알 수 없는 혼잣말을 하던 것은, 내가 다닌 초등학교 담에 큼직하게 적혀 있던 ‘반공·방첩’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다닌 학교에 민주공화국은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헌법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면, 대한민국 공교육의 1차적 소명은 대한민국 국민을 민주공화국의 구성원으로 형성하는 일이다.

공교육의 현장인 학교마다 강조되어야 할 것은 민주공화국이어야 했다. 프랑스의 학교마다 그들의 국가 이념인 ‘자유·평등·박애’가 강조되듯이. 그러나 내가 다닌 학교에서 강조된 것은 민주공화국인 아니라 ‘반공·방첩’이었다.

나는 사람과 사회를 알기 전에 증오부터 배웠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은 휴전 이듬해인 1954년. 그때부터 범생에 속하던 나는 반공교육에도 범생이었다. 5.16 군사쿠데타가 났던 중학교 2학년 때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하고……”로 시작하는 ‘혁명공약’을 열심히 암기한 게 변소 청소 당번을 면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분을 만난 운명의 날까지 나는 ‘빨갱이는 색출해 제거해야 한다’는 정언명령에 추호의 의심도 갖지 않던, 프리모 레비가 말한 ‘평범한 사람’에 속했다. 20대에 유대인 수용소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결국 만년에 자살을 선택한 ≪이게 인간인가≫의 저자인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괴물들이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위험한 존재가 되기에는 그 수가 너무 적다.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평범한 인간들이다. 의문을 품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믿고, 행동하는 기계적인 인간들 말이다.”

그렇게 평범한 사람에 속하던 나는 스무 살에 충남의 어느 골 깊은 농촌에서 그분을 만났다. 성은 나와 같은 홍 씨였고, 항렬은 나보다 한참 위인 ‘유’ 자 돌림이었다. 그는 반공포로였다. 1950년 가을 어느 날, 인민군에 반은 강제로 지원했다가 곧바로 붙잡혀 포로수용소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얼마 뒤,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으로 풀려나 타박타박 고향으로 돌아왔다.

 

인간의 삶에 하염없이 겸손하기

 

그러나 돌아온 고향에 그의 가족은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부모와 아내 그리고 나이 어린 아들 둘까지 마을 청년들이 휘두른 몽둥이에 모두 타살되어 다른 희생자 80여 명과 함께 구덩이에 묻혔다. 부역자 가족이라는 이유였다.

혼자 남은 그는 가해자들이 사는 고향을 뜨지 못했고, 몇 년 뒤 새 장가를 들었다. 그는 가난했고, 가해자들은 괜찮게 살았다. “딸만 셋이여.” 아직도 귀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그의 촉촉한 목소리. 그 뒤 나는 그분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여러 해 전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프랑스에서 돌아온 뒤의 일이다. 만년에는 날이면 날마다 술로 보냈다고 했다.

사람은 잔인했고 질겼다. 죽이는 데에 잔인했고, 살아남는 데에 질겼다. 사상과 이념 따위가 다르다는 이유는 어쩌면 인간의 잔인성과 집단 광기를 숨기려는 핑계에 지나지 않는지 모른다. 단지 다르다는 이유로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고, 집단 광기의 나락에 떨어질 수 있는 존재인가.

스무 살에 단 한 번밖에 만나지 못한 그분을 나는 상념 속에서는 수도 없이 만났다. 그분은 나에게 살아남은 것이 부채임을 끊임없이 확인시켜 준다. 그분은 내 삶의 처절한 교사다. 내가 사람에게 분노하는 대신 그런 사람을 낳는 사회에 분노한다면, 그래서 다른 사람과 싸우기보다는 그런 사람을 낳는 사회와 싸우고 나 자신과 싸우려고 애쓴다면, 그 속에 그분의 삶이 나에게 가르쳐준 바를 빼놓을 수 없다.

그분은 그의 삶을 통하여 나에게 무엇보다 인간의 삶에 하염없이 겸손할 것을 가르쳐주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죽는 그날까지.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69년 대학 입학 후 1972년 ‘민주수호선언문’ 사건으로 제적됐다가 1977년에 가까스로 졸업했다. 1979년 3월 입사한 무역회사 해외지사 근무 차 유럽으로 갔으나,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에 연루되어 귀국하지 못하고 프랑스 파리에 정착했다. 관광안내, 택시운전 등 여러 직업에 종사하면서 망명생활을 했다. 2002년 귀국 후 현재 한겨레신문 기획위원, ‘학벌없는 사회’, ‘민중의 집’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 1995년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발간. 이후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빨간신호등≫ 등이 있다.

고난의 수업은 계속 된다

 

박원순 변호사

 

어쩌자고 사무처장이라는 직책을 맡아서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정말이지 월급 못주어 자살하였다는 중소기업 사장의 심정이었다

 

#제1장면-A라는 친구에게 돈을 빌리려고 전화를 걸다.

 

박 : 아, 요즘 참여연대라는 단체에서 내가 사무처장을 맡고 있어. 내일 모레가 월급날인데 월급을 못줘서 말이야.

A : 아니 무슨 단체라고?

박 : 그… 시민단체야. 경실련하고 비슷한 데야.

A : 얼마나 필요한데?

박 : 한 몇 백만 원만 있으면 되는데.

A : 요새 나도 어려워서 말이야. 돕고는 싶은데.

박 : 알았어. 또 전화할게.

 

1994년 참여연대가 만들어진 초창기, 이때만 해도 참여연대라는 이름은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월급날은 다가오는데, 사무실 통장에는 돈이 별로 없다. 그냥 월급날을 넘길 판이다.

이리저리 전화를 돌려본다. 전화신호음이 몇 번 가기 전에 용기가 나지 않아 스스로 끊어버린다. 의외로 신호음이 한번밖에 안 갔는데 상대방이 받아버렸다. 안부만 묻다가 차마 돈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한 채 전화를 끊는다.

용케 전화를 걸어 그렇게 돈 이야기까지 하는데 만 6개월은 더 걸렸다. 그나마 저렇게 퇴짜를 당하기 일쑤였다. 세상인심을 다 알만하였다. 나는 많이들 빌려주고 그랬는데….

 

참여연대 초기, 빠듯하던 살림

 

#제2장면-B라는 교수님께 전화를 걸다.

 

박 : 교수님, 이번에 책 내셨잖아요. 잘 팔리나요?

B : 요즘 무슨 책이라도 어디 잘 나가는 법이 있나? 안 팔려.

박 : 교수님, 그 책 가지고 출판기념회를 하면 어떠실까요? 그 수익금은 참여연대에 기부한다고 하시구요.

B : 아니, 교수가 책 내는 것은 밥 먹는 것하고 같은 것인데, 무슨 출판기념회를 한단 말인가?

박 : 교수님. 아니 그게 교수님을 위한 것인가요? 참여연대를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하시는 건데 사람들이나 제자들이 다 이해하지 않겠어요.

B : 알았네. 정 그러면 그렇게 한번 해 보지.

 

빠듯한 살림을 꾸려나가느라고 안 해본일이 없던 시기였다. 교수님을 팔아 출판기념회를 열어 간단한 다과 차려놓고 한 3만원씩 받으면 1~2천만 원씩 남겼다. 심지어 출판기념회에 오지도 않는 제자들에게도 거의 강매하다시피 하였다. 몇 분 교수님이 이런 억지 행사에 그래도 응해주었다.

사실 혈액형이 A형인 나는 누구 앞에 나서는 것이 몹시 두려웠던 사람이었다. 더구나 누구에게 돈 부탁하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싫었다. 어쩌자고 사무처장이라는 직책을 맡아서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정말이지 월급 못주어 자살하였다는 중소기업 사장의 심정이었다. 비굴하고 좌절된 세월이 오래 지속되었다.

당시 참여연대 사무실은 서울 용산역 앞에 있었다. 쥐들이 많아 아침에 출근하면 책상 위에 쥐똥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늘 몸이 가려웠다. 책상이 모자라 외출하고 돌아오면 다른 사람이 자기 책상에 앉아 있곤 하였다.

사정이 이러하니 정말 안 해본일이 없었다. 일일호프를 하느라고 어느 맥주회사에 맥주 얻어오던 일, 서화전을 열어 전국의 친지들에게 강매하던 일, 명사 캐리커처 전시회를 벌여 1인당 30만 원씩 받아내던 일이 그런 사례였다. 돈 씀씀이를 줄이는 것도 크게 돈 버는 일이라는 것을 또한 그때 깨달았다.

어느 땐가부터 내 사전에는 유료로 무엇을 사오는 법이 없었다. 물건을 기부 받았던 것이다. A4용지, 볼펜 등 문방구는 말할 것도 없고, 나중에는 아예 ‘날개를 달아주십시오’라는 캠페인을 벌여 어떤 청소회사가 우리 사무실의 니스 칠을 공짜로 깨끗이 해 준 사례도 있었다. 이러면서 내 머리도 하나씩 벗겨지고 희어져갔다.

그 후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를 거쳐 지금은 내가 모금의 최고 전문가가 되었다. 그래서 과거보다는 훨씬 전화도 잘 걸고, 넉살도 떨고 잘 받아내기도 한다. 심지어 모금전문가학교를 열어 그 학교의 교장이 되기도 하였다. 세상은 변하고, 사람도 변하는 법이다.

 

시민운동가로 산다는 것

 

시민운동가가 된다는 것은 온갖 영역에서 팔방미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돈도 벌어 와야 한다. 이런 2중고에서 해방되기가 어렵다. 월급은 없거나 작게 받는다. 그야말로 풍찬노숙의 길을 걸었던 독립운동가나 다름이 없다.

그 당시 한 매체에 기고한 글에서 나는 이렇게 하소연하였다.

“시민들이 회원도 안 되어 주고 관심도 없으니 우리도 모두 시민단체 문 닫고 잘 먹고, 잘살러 가겠습니다, 이렇게 기자회견이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 많이 듭니다.” 이 기사 보고 5명이 참여연대 회원이 되어 주었다. 그러니 어찌 문을 닫을 수야 있겠는가. 그냥 푸념으로 해본 소리인데 그래도 5명이나 회원이 되어 주셨으니 감사할 수밖에.

지금은 그런 모든 일이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우리 후배들에게도 되풀이되게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아름다운재단도 만들고, 지역재단도 만들도록 부추기고 있다.

돈 걱정에서 해방하게 만들고 싶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나서는데 돈 걱정으로 머리를 아프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쉽게 되지는 않는다.

여전히 나는 그 고난의 길 위에 서 있다.

 

△1956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났다. 1974년 경기고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과대에 입학했으나 1학년 때 학내시위에 참가했다가 구속된 후 학교에서 제적되었다.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1982년부터 1년 동안 대구지검에서 검사로 있었다. 1983년 변호사를 시작한 이후 이돈명, 황인철, 홍성우, 조준희, 조영래 등의 선배들과 함께 인권변호사로 90년대까지 활동했다. 영국과 미국 유학생활을 보낸 후 1993년 귀국해 참여연대 사무처장으로 본격적인 시민운동에 뛰어들었다. 2002년 이후엔 아름다운재단, 아름다운가게,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등을 지내며 새로운 시민운동의 활로를 개척하고 있다. 국내 대표적인 시민운동가란 평가가 따르지만 그는 사람들에게 ‘원순 씨’로 불리는 것을 좋아한다.

 

 

 

 

 

 

응모방법: 이 책을 읽고 싶은 이유를 적어주세요. 

서평단 모집기간 :  9월 28일 ~ 10월3일

모집인원 : 25
 서평단 발표일 10월 4 (→ 이벤트 당첨자 발표)
서평 작성 마감일책수령 후 2주 이내 ( → 책수령과 서평완료 댓글 확인)
 

 

    응모 자격:(쪽지는 처음 신청하시는분과 연락처 변경된분만 보내세요)

  정회원만 신청 가능합니다. (준회원인 경우 등업 신청을 받으세요-지역별 모임방)

  위의 내용을 스크랩 하시고 댓글로 신청을 남겨주세요.

     1.닉네임:   2.이름:     3:신청도서     4:주소 정확히(우편번호): 

         5 :핸드폰번호:     6:직업   7: 아이디

            쪽지로 1~7번까지 적어서  예쁜글씨 앞으로 댓글 응모와 함께 보내 주세요.

 회원정보에 실명기재 확인, 블로그 공개 확인 합니다.(스크랩 확인)

 책수령 후 2주안에 자신의 블로그와 독서클럽, 인터넷 서점(YES24, 알라딘, 교보문고,

              인터파크, 리브로 등) 중 2곳에 서평을 남겨 주셔야 합니다

 

출처 : ♥독서클럽♥ 책으로 만나는 상생의 세상
글쓴이 : 예쁜글씨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