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은…
이 책은 학계와 문화계 전반의 핵심 화두가 되고 있는 통섭의 의미를, 이원적인 지식 차원이 아니라 전일적인 지성 차원의 패러다임으로 이해함으로써, 학문의 통합은 물론 과학, 예술, 종교 전반과 인간의 삶이 조화를 이루는 길을 다양한 층위에서 제시한다. 저자는 인류가 신성과 이성, 정신과 물질, 의식과 제도가 통섭되는 새 시대를 열어야 할 시점에 와 있음을 고찰하면서 새 하늘․새 땅․새사람의 새로운 문명세계로 함께 나아갈 것을 제안한다.
■ 책의 구성
제1부에서 통섭의 본질과 메커니즘, 통섭의 기술, 그리고 왜 지금 통섭이 필요한지에 대해 분석적으로 고찰하고, 상대계인 현실세계의 존재이유와 에너지 시스템인 생명계의 실상을 드러냄으로써 이원론이 근원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제2부에서는 동․서양의 통섭적 세계관의 원형이랄 수 있는 마고(麻姑)의 삼신사상과, 천부(天符)사상을 비롯한 동양의 여러 사상 및 동학에 나타난 통섭적 세계관을 생명의 관점에서 재조명하고, 통섭적 사유와 변증법, 통섭적 사유와 생태적 사유, 그리고 현대 과학의 통섭적 세계관을 일별하면서 서양의 통섭적 세계관을 역사적으로 고찰한다.
제3부에서는 ‘통합 학문’의 시대와 ‘퓨전’ 코드의 도래, 그리고 대안적 논의로서의 과학과 종교의 통섭,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통섭, 그리고 예술과 과학의 통섭의 진수를 밝힌다.
제4부에서는 마음의 과학에 대한 포괄적이고도 근원적인 이해를 통하여 지식시대에서 지성시대로 이행하는 통섭으로의 길을 제시한다.
■ 출판사 서평
<기존 연구의 지평을 넘어서다>
첫째, 통섭의 참 의미를 제시한다. 통섭은 다양한 지식세계를 넘나드는 지식 차원의 기술이 아니라, 대립되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자의식을 융섭하는 지성 차원의 영적 기술임을 밝히고 있다.
둘째, 통섭학과 통섭정치의 전망을 제시한다. 동서고금의 통섭적 세계관을 고찰하여, 이원론적인 근대의 지식체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인 통섭학과 통섭정치의 기본 틀을 제시한다.
셋째, ‘통합 학문’의 길을 제시한다. 과학과 종교의 통섭,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통섭, 그리고 예술과 과학의 통섭의 진수를 밝힘으로써 경계선 없는 ‘통합 학문’의 길을 제시한다.
넷째, 실천적인 삶의 방법론을 제시한다. 마음의 과학에 대한 포괄적이고도 근원적인 이해를 통하여 삶과 학문, 삶과 종교, 삶과 과학, 삶과 예술의 화해를 도모함으로써 실천적인 삶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자연과학 중심주의에 머문 서구 통섭론을 비판하다>
미국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그의 저서 컨실리언스 Consilience에서 말하는 ‘지식의 통일’ 개념은 의식계와 물질계의 상관성을 인식하지 못하여 직관적인 앎을 배제하고 말았다. 최민자 교수는 온전한 앎은 이론적 지식의 통합에서가 아니라, 그러한 통합의 궁극적 기반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일어난다고 말한다. 양자물리학자 데이비드 봄의 ‘숨은 변수이론’에서 보듯, 개체로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드러난’ 물리 세계는 그러한 이원성을 넘어선 ‘숨겨진’ 전일성의 세계가 물질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윌슨은 사물의 근본 이치와 관련된 초논리․초이성․직관의 영역은 배제하고, 사물의 현상적 측면과 관련된 감각적․지각적․경험적 판단의 영역만을 중시한 나머지, 통섭에 관한 논의가 실험 과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봄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연과학 중심의 학문적 제국주의―생물학 제국주의―를 초래했다. 다시 말해 윌슨은 서양의 분석적 사고가 동양의 종합적 사고와 융합할 때 비로소 완전한 통섭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고, 통섭을 논하면서 통섭에 반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것이 인류 의식 수준의 현주소다.
<서구의 이원론을 넘어서는 관점으로 통섭을 논의하다>
컨실리언스의 번역서(통섭) 서문은 “설명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로 시작된다. 그러나 진리는 설명 차원이 아니라 이해 차원의 문제이며, 추론 차원이 아니라 직관 차원의 문제다.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존재’가 내 생각을 존재와 동일시하는 에고(ego)로서의 존재이듯, 역자인 최재천의 ‘설명하는 존재’ 또한 내 설명을 존재와 동일시하는 에고로서의 존재이다. 에고는 곧 분리의식이며 분리의식으로 통섭을 논할 수 없다. 그러한 유(類)의 통섭은 그야말로 ‘다학문적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범학문적 접근’을 통한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만남 또한 그 ‘만남’의 메커니즘을 간파하지 못하면, 통합 학문에 관한 논의는 언어 수준의 지적 희론(戱論)에 불과한 것이 된다. 생명은 ‘전일적인 흐름’ 그 자체인 까닭에 에고의 가장 큰 위협이며 적(敵)이다. 그래서 에고는 ‘죽음’이라는 발명품을 만들어냈으며, 그로부터 이원론의 표징이랄 수 있는 ‘삶과 죽음의 투쟁'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지식과 삶이 화해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여 삶과 소통하지 못하는 지식을 넘어서기 위해 ‘통섭’ 개념이 등장하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원적인 지식으로 통섭을 운위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지적(知的) 사기’일 뿐인 것이다.
<생명에 대한 온전한 앎과 관련되는 통섭의 본질을 논의하다>
저자는 우주의 실체는 물질적 껍질이 아니라 의식이라고 말한다. “우주의 실체는 의식”이라는 말은 “‘삶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현상을 통제하는 주체가 심판의 신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이라는 의미이다. 신성[영성]과 이성이 조화를 이루었던 상고와 고대 일부의 제정일치 시대, 세속적 권위에 대한 신적 권위의 가치성이 정립된 중세 초기, 왜곡된 신성에 의한 이성의 학대가 만연했던 중세, 신적 권위에 대한 세속적 권위의 가치성이 정립된 근세 초기, 왜곡된 이성에 의한 신성의 학대가 만연한 근대 이후 물질만능주의 시대를 거쳐 다시금 인류가 신성과 이성, 정신과 물질, 의식과 제도의 통섭 시대를 열어야 할 시점에 이르게 된 것은 인류 역사의 부단한 진전과 노력의 결실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통섭의 기술은 이러한 시스템적 사고에 기초하며, 생명계는 불가분한 전일성의 세계, 즉 ‘살아 있는 시스템'인 까닭에 통섭의 영적 기술을 향상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우주의 본질인 생명에 대한 온전한 앎을 높여가는 것이다. 완전한 소통․자치․자율에 기초한 생명시대의 개막은, 즉 새 하늘과 새 땅을 여는 새로운 문명은 이로부터 촉발되는 것이다.
<인류의 새로운 문명을 예기(豫期)하다>
필자는 통섭적 마인드에 입각해 ‘하나됨’을 실천할 때 인류의 새로운 문명이 시작될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 ‘하나됨’은 온전한 앎, 즉 지성에서 일어난다고 본다. 따라서 심(心)에 입각하여 무심(無心)을 이루듯, 지식에 입각하여 지성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knowledge)은 관념이고, 파편이며, 과거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온전한 앎은 지식에서 일어날 수 없다. 반면 지성(intelligence)은 실재이고, 전체이며, ‘지금 여기’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온전한 앎은 지성에서 비로소 일어난다. 따라서 통섭은 지식 차원에서가 아닌, 지성 차원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권력정치가 마지막 맹위를 떨치는 오늘의 정치와 과학은―심지어는 종교까지도―모두 생명의 지배와 장악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저자는 이러한 생명정치의 분열이 전일적인 새로운 패러다임의 정치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고 보는데, 이는 권력정치에서 생명정치로의 이행과 맥을 같이 한다. 저자는 또, 통섭의 새로운 문명은 우리의 참본성인 영성에 대한 자각이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고 한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영적인 본질에서 도출된 ‘여성성’이 인류 구원의 여성성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도 ‘여성성’이 곧 영성임을 전제할 때 유효한 것이다. 오늘날 학계에서의 통섭 논의는 궁극적으로는 삶과 학문, 삶과 종교, 삶과 과학, 삶과 예술, 나아가 삶과 죽음의 통섭을 위한 서곡에 지나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주의 유일 원리와 소통하는 참된 통섭을 논하다>
통섭은 영성과 물성을 소통하는 지성 차원의 영적 기술이기에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시스템적 세계관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전제한다. 그것은 소통의 미(美)의 발현을 통해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진정한 의미의 예술이기도 하다. 다양한 분야를 여기저기 기웃거린다고 해서 통섭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양한 분야를 관통하는 핵심 원리를 알아야 실제 통섭이 이루어진다. 우주만물의 다양성은 유일 원리가 물화(物化)되어 나타난 것이므로 하나인 생명의 본체와 그 작용인 우주만물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생각은 바꾸지 않은 채 물질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것은 마치 실물은 그대로 둔 채 그림자를 바꾸려는 것과도 같이 비현실적이다. 이 세상 그 어떤 지식이나 학문도 삶과 분리되어서는 존재이유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참자아인 영성을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소하는 길이다. 영성을 자각하기 위해서는 소음으로 가득 찬 마음을 멈추어야 한다. 텅 빈 마음에서 변형이 일어나고 초월이 일어난다. 이것이 마음의 해방이다. 진정한 해방은 마음의 해방에서 오고, 통섭을 수행하는 마음은 바로 그 해방된 마음이다. 오늘날 지식인은 많으나 지성인은 드문 것은, 마음은 본능적으로 채우는 데는 능하지만 비우는 데는 능하지 않은 까닭이다.
<보이는 우주와 보이지 않는 우주를 통섭하다>
‘보이는 우주’는 ‘보이지 않는 우주’, 즉 영(Spirit)의 자기복제로서의 작용으로 나타난 것이다. ‘영[의식계]’이 생명의 본체라면, 육[물질계]은 그 작용으로 나타난 것이다. 말하자면 물질세계는 ‘영’ 자신의 설계도가 스스로의 에너지․지성․질료의 삼위일체의 작용으로 형상화되어 구체적 현실태로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형상은 본체인 ‘영’의 잠재적 본질이 드러난 것이므로 우주만물은 물질화된 ‘영’이고 그런 점에서 우주만물은 ‘영’과 둘이 아니다. 생명의 전일성과 자기근원성, 만유의 근원적 평등성과 유기적 통합성이 이로부터 도출된다. 영과 육, 본체와 작용이 하나임을 아는 것은 일심[참본성, 영성]의 통섭적 기능에 의해서이다. 말하자면 통섭은 일심의 기능적 측면을 일컫는 것으로 통섭의 주체는 일심이다. 일심[靈]이 통섭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우주 생명력 에너지인 동시에 우주 지성이며 근본 질료인 까닭에 본체와 작용, 전일성과 다양성, 정신과 물질을 하나로 관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심은 지식(knowledge)이 아니라 앎(knowing)이며, 앎은 지성에서 일어난다. 이원적인 지식의 영역에서 통섭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파편화된 삶을 넘어 전일적인 삶으로 가는 길-통섭>
삶 자체가 의식의 자기교육을 위한 학습과정이며, 의식을 탐구하는 수단으로서 감각기능이 주어지고 학습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학습 기자재로서 상대계인 물질계가 존재한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서는 통섭을 온전히 논할 수 없다.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통섭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며, 논리와 초논리, 이성과 신성, 물질과 정신의 통합성을 기반으로 한 지식의 차원 전환이 없이는 통섭은 불가능한 것이다. 온전한 앎이 없이는 생명의 본질에 순응하는 온전한 삶도 없으므로 그 어떤 실질적인 통섭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앎과 삶에 치명적으로 유해한 것이 바로 모든 부정성의 근원인 개체화된 자아 관념이다. 이러한 자아 관념을 넘어선 초인의 출현은 곧 개체화되고 물질화된 신[物神]의 죽음을 의미한다. 물신은 죽어야 하고 또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 왜냐하면 신인류의 탄생이 목전에 와 있기 때문이다. 실로 영적 진화를 추동하는 마음의 과학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그 어떤 실제적인 통섭도 일어날 수가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있음(being)'이 전체와 분리된 개체로서가 아닌, 유기체로서의 관계론적 의미임을 이해할 때 비로소 통섭이 일어난다.
■ 저자 ; 최민자
저자는 국내 대학 졸업 이후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학문의 일가(一家)를 이루었고, 귀국 후 대학 강단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으로 여해(如海) 스승을 만나면서 내단(内丹)의 극에 달한 동굴수업[수련]을 거쳤다. 곧 이어 무호(無号) 스승을 만나면서 우리 상고사 및 사상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에게 부여된 내밀한 사명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10여년은 두타행과도 같은 학문 세계와 현실 세계 편력이 이어졌다. 1994년 장보고의 역사적 재조명을 위하여 중국 산둥성에 장보고기념탑을 건립하였고, 1999년 유엔세계평화센터 건립을 위한 4자(한․중․러․유엔) 조인식을 마치고 현재 건립을 진행 중이다.
2000년대 들어서 동학 및 천부경과의 만남을 통해 생명학 3부작-천부경․생태정치학․생명에 관한 81개조 테제-을 완성하는 학문적․실천적 역정을 거쳐, 금번 통섭의 기술을 통해 학문의 현실 환원을 새롭게 모색하게 되었다.
__現 성신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 동학학회 회장
__부산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__미국 애리조나주립대학교(Arizona State University) 정치학 석사
__영국 켄트대학교(University of Kent) 정치학 박사
__중국 북경대학교 visiting professor 및 연변대학교 초빙교수[客座敎授]
__1994년 장보고 대사의 해외거점이었던 중국 산동성에 장보고기념탑 건립(건립위원장, 현지 문물보호단위로 지정)
__1999년 중국 훈춘에서 유엔측 대표, 중국 훈춘시 인민정부 시장, 러시아 핫산구정부 행정장관 등과 중국・북한・러시아 3국접경지역 약 2억평 부지에 유엔세계평화센터(UNWPC) 건립을 위한 조인식(유엔세계평화센터 건립위원장)
__저서로는 삶의 지문(모시는 사람들, 2008),生命에 관한 81개조 테제: 生命政治의 구현을 위한 眞知로의 접근(모시는사람들, 2008), 生態政治學: 近代의 超克을 위한 生態政治學的 對應(모시는사람들, 2007), 天符經․三一神誥․參佺戒經(모시는사람들, 2006), 東學思想과 新文明(모시는사람들, 2005), 世界人 張保皐와 地球村 經營(범한, 2003), 새벽이 오는 소리(창해, 2002), 直接時代(범한, 2001), 길(道)을 찾아서(까치, 1997) 등이 있다.
__논문으로는 「東學과 現代 科學의 生命思想」(2009), 「生命政治論」(2009), 「政治的 義務의 原理에 관한 小考」(2008), 「生態政治學的 思惟와 現代 物理學의 實在觀」(2007), 「天符思想과 新文明」(2006) 등이 있다.
■ 책 속에서....................
통섭의 기술은 단순히 다양한 지식세계를 넘나드는 지식 차원의 언어적 기술이 아니라, ‘아(我 self)’와 ‘비아(非我 other)’의 두 대립되는 자의식을 융섭하는 지성 차원의 영적 기술이다. 소통의 미美의 발현을 통해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진정한 의미의 예술이다. 지금까지 통섭에 대한 학계의 관심은 주로 통섭의 당위성에 대한 분석과 설명 내지는 이원적인 지식 차원의 통섭에 머물렀던 관계로, 동서고금의 통섭적 세계관과 통합 학문 그리고 통섭의 메커니즘을 망라하는 전체적인 지성 차원의 통섭이 체계화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통섭은 본질적으로 전일적이고 영적인 까닭에 논리적인 지식 차원이 아닌, 직관적인 지성 차원에서 일어난다. 지식은 관념이고 파편이며 과거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지식의 통섭이란 말은 성립될 수 없다. 삶과 유리된 단순한 지식의 통섭은 이념의 지도를 영토 그 자체라고 믿는 것과도 같이 공허한 것이다.…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통섭 또한 성리와 물리, 정신과 물질의 합일에 대한 이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이처럼 통섭의 기술은 시스템적 사고에 기초한다. 시스템적 사고란 부분을 단지 전체 조직과의 맥락 속에서만 파악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통섭의 기술’ 중에서
전체성인 참자아(spiritual self)가 왜 자기복제로서의 작용을 통해 개체성인 물질적 자아(corporal self)의 형태로 현현하는가? 그것은 앎을 존재로서 체험하기 위한 것이다. 비존재와 존재, 영성과 물성이 하나임을 알기 위해서는 앎을 존재로서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신은 오직 물질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구현할 수 있는 까닭이다. 이분법은 앎의 원을, 삶의 원을 완성시키기 위한 방편일 뿐, 진정한 앎은 이원성을 넘어서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선과 악의 진실게임에 빠져들게 되면 ‘삼사라(samsara 生死輪廻)’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물성과 영성의 역동적 통일성’ 중에서
인간이 육체적 죽음과 더불어 영원히 사라진다는 비과학적인 생각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그것은 우주의 실체가 육체와 같은 물질적 껍질이 아니라 의식이라는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또한 에너지가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화할 수는 있지만 어떠한 물리적 변화에서도 모든 물체가 지닌 에너지의 총량은 불변이라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이 우주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우주는 오직 우주 섭리에 따라 스스로 생성되고 스스로 변화하여 스스로 돌아가는 ‘참여하는 우주’인 것이다. 지구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생명체이며, 우리 모두는 지구의 몸을 이루고 있는 세포들로서 우리가 지구에 가한 가혹행위는 그대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말하자면 생명계는 이른바 ‘부메랑 효과(boomerang effect)’로 설명되는 에너지 시스템인 것이다. ─‘에너지 시스템인 생명계’ 중에서
생명은 분리 자체가 근원적으로 불가능한 절대유일의 하나인 까닭에 본체의 측면에서는 유일신이지만, 유일신의 자기복제로서의 작용으로 우주만물이 나타난 것이니 작용의 측면에서는 천ㆍ지ㆍ인 삼신이다. 다시 말해 ‘하나’인 혼원일기(混元一氣, 唯一神)에서 천ㆍ지ㆍ인 셋[三神]이 갈라져 나온 것이므로 천ㆍ지ㆍ인이 각각 있는 것이 아니고 작용으로만 셋이라는 뜻으로 천ㆍ지ㆍ인 삼신이 곧 유일신이다……무수한 사상事象이 펼쳐진 ‘다(多, 三)’의 세계와 그 무수한 사상이 하나로 접힌 ‘일一’의 세계는 외재적(extrinsic) 자연과 내재적(intrinsic) 자연, 작용[물질계]과 본체[의식계]의 관계로서 상호 조응해 있으며 상호 관통한다. 따라서 삼신사상이 곧 ‘한’사상이다. 여기서 마고의 삼신사상을 다루는 것은 그것이 통섭적 세계관의 원형을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고의 삼신사상’ 중에서
‘생명의 3화음적 구조(the triad structure of life)’는 생명의 본질 자체가 본체眞如, 靈性와 작용生滅, 物性의 상호 관통에 기초해 있는 데서 기인하는 것으로 통섭적 세계관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다…일심의 통섭적 기능은 본체와 작용 그 어느 것에도 구애됨이 없이 양 차원을 모두 포괄하는 동시에 초월함으로써 발휘된다. 일심의 경계에 이르지 않고서는 본체와 작용이 하나임을 알 길이 없으므로 일심의 경계를 본체와 작용의 합일이라는 변증법적 논리구조로 나타낸 것이다…체體·용用·상相을 나타낸 불교의 삼신불(三身佛: 法身·化身·報身), 기독교의 삼위일체(聖父·聖子·聖靈), 그리고 동학 「시侍」의 세 가지 뜻인 내유신령內有神靈·외유기화外有氣化·각지불이各知不移는 천부사상의 중핵을 이루는 천·지·인 삼신일체의 가르침과 그 내용이 같은 것으로 모두 일심의 세 측면, 즉 본체-작용-본체와 작용의 합일을 나타낸 것이다…이러한 일심의 세 측면은 성부·성자·성령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삼위일체三神一體로서 ‘회삼귀일(會三歸一, 三卽一)’의 이치에 입각하여 혼원일기混元一氣인 ‘하나(一)’, 즉 유일신으로 돌아간다…유일신 논쟁은 일즉삼·삼즉일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함으로 해서 본체와 작용을 분리시킨 데서 오는 것으로 일심의 통섭적 기능이 회복되면 자연히 종식될 것이다. ─‘천부사상의 통섭적 세계관’ 중에서
서양철학은 기원 전 600년경 주로 이오니아의 여러 지방에서 활동하던 그리스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소크라테스 이전의 고대 초기 철학이 이오니아를 중심으로 주로 우주 혹은 자연의 원리에 대한 깊은 관심의 표명에서 비롯되었다면,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시기는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고대 철학의 최전성기로서 소크라테스에 의해 철학의 인간학적 주제가 다뤄지고 이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체계화된 시기이다. 헬레니즘·로마시대의 고대 말기 철학은 주로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에 의해 안심입명安心立命을 구하는 개인 윤리와 실천문제가 중점적으로 다뤄졌다. 고대 이오니아의 철학자들은 생장하고 소멸하는 우주자연의 변화와 그러한 현상의 배후에서 작용하는 변증법적인 운동 원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들의 지적 탐구는 감각적·현상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사물의 궁극적인 원리에 대한 규명으로까지 나아갔다. 그들은 운동과 변화 속에서 통일의 원리를 읽었으며, 종래의 신화적·의인관擬人觀적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여 수학·천문학 등의 과학과 함께 일원론적이고 물활론(hylozoism)적이며 우주론적인 자연철학을 전개했다. ─‘통섭적 사유와 변증법’ 중에서
과학과 종교의 통섭에 관한 논의가 획기적인 전기를 맞게 된 것은 현대물리학의 ‘의식意識’ 발견에 있다. 이러한 ‘의식’ 발견은 정신·물질 이원론에 입각한 근대 과학의 기반 자체를 흔드는 것이라는 점에서 현대물리학의 가장 위대한 발견이라 할 만하다.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이 성립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 양자역학적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심이문一心二門이라는 마음의 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생겨났고, 색즉시공色卽是空·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는 본체계와 현상계의 유기적 관계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생겨난 것이다…이미 수천 년 전 직관에 의해 밝혀진 종교적 진리를 현대물리학은 실험을 통하여 입증하느라 머나먼 길을 걸어온 셈이 된 것이다…그리하여 과학과 종교, 논리와 직관의 상보성을 사실상 인정함으로써 사실 그대로의 전일적인 우주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종교가 심법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양자역학 또한 ‘마음의 과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과학과 종교의 만남’ 중에서
근대 분과학문의 경계를 허물고 지식의 융합을 통해 복합적이며 다차원적인 세계적 변화의 역동성에 대처하려는 움직임이 전 세계적으로 일고 있다…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통섭은 전자가 후자에 종속되는 환원적 통합이 아니라 상호 관통하는 대등한 의미의 통섭이라는 점에서 에드워드 윌슨의 자연과학 중심의 통섭 논리와는 구별된다…“이 세상에는 다수의 진리가 존재하는가? 아니면 단 하나의 기본 진리만이 존재하는가?”라는 윌슨의 질문은 전개와 통합이 자유로운 통섭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것이다. 무수한 사상事象이 펼쳐진 다多의 현상계와 그 무수한 사상이 하나로 접힌 일一의 본체계는 상호 조응해 있으며 상호 관통하므로 다多가 진리이듯, 일一 또한 진리이다. 생명의 본체인 하늘[一]이 진리이듯, 그 작용인 우주만물[多] 또한 진리이다. 윌슨이 중시하는 ‘경험적 시험(empirical tests)’, 즉 환원주의에 근거한 분자생물학적 접근으로는 본체와 작용, 전일성과 다양성, 전체성과 개체성의 상호 관통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통섭의 노력이 일체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진리에 이르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일심의 기능적 측면과 관계된다.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통섭’ 중에서
20세기가 과학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과학과 영성의 접합시대라는 점에서 예술과 과학의 통섭은 시대적 필연이다. 인류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과학은 예술에 방법론적 도구를 제공하고 예술은 과학 발전에 창의적 모델을 제공하며 논리적 이성과 창의적 직관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통해 진화해 왔다는 사실에서 예술과 과학의 불가분성은 잘 드러난다. 예술과 과학은 창조성이라는 공통된 정신작용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이러한 창조성의 발현에는 뇌에서의 ‘시각화 과정’이 필수적이다. 뉴턴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깨달은 것,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가 포도주 압착기의 작동을 보고 인쇄기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은 것… 등은 그 좋은 예다. 예술과 과학이 탐구와 정복의 정신을 통해 자연 구조를 재현하려는 것은 그것이 우주의 본질인 생명과 소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과학적 지식이 참 앎이 되기 위해서는 영성과 결합해야 하며 이는 창조적 영감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근대의 과학적 지식은 보는 자와 보는 대상이 분리되어 있으므로 ‘봄(seeing)’ 그 자체가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참 앎(knowing)이 일어날 수도 없다. 예술적 상상력과 고도로 각성된 의식 속에서 예술과 과학의 창의성은 최고도로 발휘된다. ─‘예술과 과학의 통섭’ 중에서
이 세상이 마음속 생각의 투사영이라면, 왜 마음속 생각과 실제 체험 간에 시차가 일어나는가? 다시 말해 왜 마음먹은 대로 즉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인가? 생각과 체험 간의 시차는 우리가 유한한 몸을 가지고 시간이라는 관점 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몸과 시간은 의식의 자기교육 과정에서 ‘지금 여기’, 즉 순수 현존(pure presence)에 이르기 위한 필수적인 학습 도구다. 그러나 우리가 몸을 떠나 물질계에서 영계로 이동하면 시간이라는 관점에서도 떠나게 되므로 그러한 시차는 사라진다. 따라서 마음속 생각과 실제 체험 간에 어떤 지체도 없이 생각대로 즉시 이루어진다. 물질계에서는 생각과 체험 간의 시차로 인해 양자의 인과성을 인식하지 못하다가, 영계에서는 그 시차가 사라져 양자의 인과성이 마치 실물과 그림자의 관계와도 같이 동시적이고도 즉각적으로 나타남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반복적인 시행착오의 과정을 통해 생각을 조절하는 법을 점차 익혀가게 된다. 그러나 영계에서의 학습은 물질계에서의 감각적 체험과 시간이라는 관점에 의한 것만큼 구체적이고 치열할 수는 없는 까닭에 상대성과 물질성이라는 관점 속으로 다시 들어오게 된다. 말하자면 삼사라(samsara 生死輪廻)가 일어나는 것이다. 무엇을 위하여? 영적 진화를 위하여.…실로 이 우주를 관통하는 의식의 대운하를 건설하지 않고서는, 영적 진화를 추동하는 마음의 과학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그 어떤 실제적인 통섭도 일어날 수가 없다. ─‘마음의 과학’ 중에서
근대성이 ‘미완성의 프로젝트’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근대성 운동의 논리 자체가 이원성, 즉 분별지分別智에 기초해 있는 까닭이다.…근대성이 완성의 프로젝트가 되려면 근본지根本智에 기초하여 분리가 아닌, 합일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지식시대에서 지성시대로의 차원 전환은 물적 가치에서 영적 가치로의 차원 전환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지식은 미혹의 강을 건너는 나룻배와도 같은 것.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나룻배가 필요하나, 진리의 언덕에 오르기 위해서는 배를 버려야 한다.…통섭이라는 툴(tool)을 사용하는 주체가 바로 일심이다. 일심[참본성, 영성]이 통섭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우주 생명력 에너지인 동시에 우주 지성이며 근본 질료인 까닭에 본체와 작용, 전일성과 다양성, 정신과 물질을 하나로 관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심은 지식(knowledge)이 아니라 앎(knowing)이며, 앎은 지성에서 일어난다.…지식은 단편적이고 관념이며 과거와 연결되어 있지만, 지성은 전체적이고 실재이며 ‘지금 여기’와 연결되어 있다. 지성은 전일적이고 자족적이며 자각적이다. 지성은 자치·자율·소통과 조응하며, 이들 덕목은 지성시대를 구현하는 기초가 되는 것이다. 한 사회의 진화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것은 개체성과 전체성의 소통성이다.…인간은 영적으로 진화할수록 무엇이 진실로 자신에게 쓸모 있는 것인지를 알게 되므로 기쁨에 대한 개념도 계속해서 바뀔 수밖에 없다. ─ ‘지식시대에서 지성시대로’ 중에서
■ 목차
제1부┃ 통섭의 이해
01 통섭이란 무엇인가 / 02 상대계의 비밀 / 03 삶과 죽음의 통섭
제2부┃ 동양과 서양의 통섭적 세계관
04 마고麻姑의 삼신사상 / 05 동양의 통섭적 세계관 / 06 서양의 통섭적 세계관
제3부┃‘통합 학문’의 시대와 ‘퓨전(fusion)’ 코드
07 과학과 종교의 통섭 / 08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통섭 / 09 예술과 과학의 통섭
제4부┃ 통섭으로의 길
10 마음의 과학 / 11 지식시대에서 지성시대로
■ 추천사
진리로, 빛으로, 영원으로
현대는 퓨전시대라고 한다. 학계에서 퓨전은 전문분야의 전문가들 간에 상호 협조 내지는 공조를 통한 상승적인 결합을 일컫는 용어다. 과학계는 이미 퓨전적 공조 없이는 우주 시대에 고아가 된다고 사고하게 되었다. 이제 과학계뿐만 아니라 교육, 사회, 정치, 문화 등 모든 분야에 퓨전적 공조가 절실히 필요하다. 이러한 퓨전시대에 ‘통섭의 기술’이야 말로 상호 공조의 효율적 성취를 위한 기계 작동의 윤활유이다.
추천사를 의뢰 받은 본인은 최 교수의 주옥 같은 여러 저서들--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 생태정치학, 생명에 관한 81개조 테제, 동학사상과 신문명, 세계인 장보고와 지구촌 경영, 삶의 지문 등--을 접해 본 적이 있다. 최 교수의 저서들 가운데 특히 이번 통섭의 기술은 대안적인 통섭학과 통섭정치의 기본 틀을 제시함으로써 지식과 삶의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단연 주옥 중의 주옥이다. 최 교수는 원융무애한 생명의 역동적 본질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統攝’과 구분하여 ‘統涉’이란 한자어를 사용하였다. 이 용어는 생명의 전일성에 기초한 ‘지성 차원의 영적 기술’임을 강조한 것이라 사료된다.
본인은 파동 과학으로 보는 새로운 원자 모델이란 저서를 발간한 바 있다. 두 개의 원소가 결합하여 제3의 새로운 물질이 생성되는 과학 이론을 전개하는 데는 핵반응의 높은 결합에너지가 필요하다. 이 에너지를 대체하여 염산(HCL)의 수소와 염소의 결합 또는 해체 반응 에너지와 물질의 정전기적 쿨롱 인력과 원소 외각의 전자 활동의 전자기 인력과 광파에너지와 물분자 전자파 등 다원적 에너지에 의해 핵자기 공명을 일으켜 두 원소의 결합으로 제3의 물질이 되기 위한 에너지를 만족시킨다는 것을 서술한 바 있다. 다니엘 러더퍼드(Daniel Rutherford, 1749-1819)가 핵들이 포격 포획하여 표적 핵들의 정체를 변화시키는 핵반응을 발견한 이래, 입자가속기와 입자검출기 분야의 첨단 기술에 힘입어 적어도 1000GeV(=1TeV)의 높은 에너지로 입자에너지 성취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에너지로는 경제성 문제가 숙제로 남게 되었다.
본인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속박되지 않고 원소의 정전기적 쿨롱 인력과 원소 외각의 전자 활동의 전자기 인력과 광파에너지와 물 분자의 공진공명 핵자기장 인력 등 다원적 에너지를 촉진하는 염산과 광촉매 등을 이용하여, 고철 등 철 원소를 부가가치가 높은 구리 원소로 변성 생성케 하여 구리 잉고트ingot의 양산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바로 다원적 에너지를 이용한 핵자 이동으로 새로운 물질을 만들 듯이, 통섭에는 기술융합뿐만 아니라 물질계와 의식계의 융섭을 추동하는 창조성의 원리가 내재되어 있다. 최 교수의 통섭의 기술은 에너지 시스템인 생명계의 실상을 드러냄으로써 이원론이 근원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님을 명료하게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 물리학의 전일적 실재관과 맥을 같이 한다. 특히 이 책은 기존의 이원적인 지식 차원의 통섭을 뛰어넘어 동·서양의 통섭적 세계관과 통합 학문 그리고 마음의 과학에 대한 포괄적이고도 근원적인 이해를 통하여 전일적인 지성 차원의 통섭을 처음으로 체계화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최 교수는 동서고금의 통섭적 세계관에 대한 면밀한 고찰을 통하여 현상계와 본체계의 상관관계를 규명하고 나아가 생명의 순환고리를 인식하게 함으로써 온전한 통섭으로의 길을 제시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을 생수같이 시원하게 하고, 우리의 의식을 영적인 지혜의 불로 타오르게 함으로써 “미망으로부터 진리로,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죽음으로부터 영원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을 제공한다. 실로 이 책의 한 자 한 자, 그 깊고도 오묘한 힘이 벌써 우리의 영혼을 쉬게 하고 있지 않은가?
혼자만의 영광을 감당하기에 송구스러워 독자들에게 권하고자 한다.
2010년 1월 여의도 연구실에서
윤희봉
◆ 응모방법: 이 책을 읽고 싶은 이유를 적어주세요.
◆ 서평단 모집간 : 1월 27일 ~ 2월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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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표일 : 2월 3일 (→이벤트 당첨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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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1월부터는 서평 이벤트 당첨 확인 후 출판사 담당자에게 메일로 책 받을 배송정보를 보내주시고 댓글로 확인을 남겨주셔야 합니다.(→이벤트 당첨자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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