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에 선정된 이은식 박사의 신작
『풍수의 한국사』
풍수와 무관한 터는 없다.
인문학과 풍수학은 빛과 그림자와 같다
풍수학적으로 살펴 본 명당과 흉당, 그 곳에서 배출된 이들의 흥망성쇄
먼저 『풍수의 한국사』는 어떻게 하면 좋은 터를 찾고 어떤 곳이 명당이고 흉당인지를 밝히기 위해 발간된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 풍수에 대한 이해를 위해 1부에서 풍수의 기본 원리에 대해 설명했지만 그보다는 어떤 터로 인하여 사람의 인생에 영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는 사실에 기인하여 명당과 흉당, 그리고 그곳에서 태어난 인물과 그 후손의 삶에 미친 영향 등 선현들의 인생과 나라에까지 미친 역사에 초점을 둔 인문서이다.
세종대왕이 효심으로 선택한 묘터로 인해 세조를 제외한 다른 자식들은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이후 그 흉당을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명당은 공교롭게도 이인손의 묘택이었고, 이인손의 아들은 아버지의 유택을 내어줘야만 했다. 그러나 어떠한 사람이건 고귀한 것처럼 산에는, 그리고 더 넓게 땅에는 나쁜 땅이란 없다. 사람에게 그 재주와 능력에 맞지 않은 일을 시키면 못난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처럼 터를 고르는 사람이 땅의 성격을 알지 못하고 용도를 잘못 선택하는 것은 그 사람의 어리석음이거나 잘못이지 절대로 땅이 나쁜 까닭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경기도 여주와 이천 땅에서 왕후가 많이 배출되었으나 그 인물들과 주변인들의 삶을 살펴보면 밝은 면만이 그들의 인생이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고 이괄의 난을 비롯하여 이경준, 홍양걸, 박필상, 유한신의 난 등 반란이 많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또한 최영과 성삼문은 그들이 남긴 큰 이름만큼 겪기 힘든 고난의 삶을 살아야 했다.
이처럼 『풍수의 한국사』가 어떻게 하면 명당을 얻을 것인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과 역사적 사건들을 반추하며, 자신의 삶의 방향을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가를 위한 목적으로 읽혀지길 바란다.
작가 소개
“필자는 다만 이 땅에서 살다 가신 선현들의 행적을 가감 없이 후세인들에게 남겨야 한다는 것과 잘못 알려지고 잘못 기록된 부분을 찾아 그 내용을 명료하게 남기려는 신념하에 선현(선인)들의 발자취와 만년유택을 찾아 때와 곳을 가리지 않고 전국을 대상으로 답사하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보게 되는 것이 집터와 무덤터였다. 답사한 그곳엔 단 한 곳도 풍수학설과 무관한 곳이 없었고 인문학과 풍수학은 빛과 그림자와 같았다. 우리 민족의 삶의 중심에는 풍수학설이 너무나 크게 자리 잡고 있으며, 뿌리 또한 깊은 곳까지 뻗고 있어 놀라는 경우가 많았다.”
이은식 박사는 숨겨지고 잊혀져 가는 역사, 왜곡된 역사에 대한 안타까움을 품고 반평생의 세월 동안 전국을 답사하며 선현들의 묘소와 자취, 사료들을 찾아내고 고증하였다. 전직 교사였던 그가 선조들의 행적을 찾아 진실된 역사를 발굴해 내고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던 노력이 이제 결실을 맺고 있다. 『풍수의 한국사』 또한 숨겨진 역사를 발굴해 가는 과정에서 풍수학과 선현들의 삶이 놀랄 만큼 뿌리 깊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으며 나온 결실이다. 앞으로도 선현들의 삶을 통해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고 자신을 바로 세울 수 있는 지침서가 될 다양한 역사서들을 지속적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문학박사ㆍ철학박사
한국인물사연구원 원장
사)퇴계학연구원 퇴계학진흥협의회 이사
사육신현창회 연구이사
성균관 수석 부관장
서울문화사학회 이사
사)사명당기념사업회 이사
추천평
이은식李垠植 님의 글은 한국인의 내면을 탐구하는 소중한 ‘안으로의 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저작은 한국 전통 문화의 맥을 짚어,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섬세한 구김살을 열어보는 투시력의 소산이다. 사전辭典 지식으로는 맛볼 수 없는 현장성 그리고 그 배후를 꿰뚫는 정성과 분석력이 대단한 분이시다. 그의 원고를 보면 내가 누구이며 내가 어디에서 왔으며 내가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의 방향을 확실히 제시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방대한 ‘문화 탐구의 기행’인 동시에 ‘역사 인물 기행’은 우리의 시선을 마음의 내면 세계로 향하게 하는 화살표요 그 지도가 되는 것이다. 고정관념을 버리고 선조들이 살던 시대의 삶과 문화, 그리고 한 분 한 분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 미래의 역사를 만나게 될 것이다.
겉만 보고 한국인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복잡하고 불가사의한 한국인의 내면을 알고 나서야 우리는 우리 역사 속 한국인의 참모습을 알게 될 것이다. 검은 암탉이 하얀 알을 낳고, 검은 소가 흰 우유를 쏟아내듯이 이은식 님의 책은 오늘날같이 혼탁한 세상에 샘물 같은 그런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어령李御寧 초대 문화부 장관
출판사 리뷰
자연 풍토도 인간도 존재 자체에서의 신비성은 어쩔 수가 없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풍수가 발하는 효능을 기대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오늘날 지리학과 건축학 분야에서 재해석되고 있는 취락 입지, 집터 잡기, 대지垈地 내의 건물 배치에 관한 풍수지리설의 입장으로 땅에 대한 유기적 관련성의 강조는 오늘날 매우 합리적이라는 평가이다.
세종처럼 총명하고 영특한 현군에게 있어 풍수는 역사와 지리와 우주를 꿰뚫는 장엄한 천지조화의 대법칙으로 이해되어졌다. 역대 『조선왕조실록』 중의 하나인 『세종실록』에 풍수와 관계한 자료가 가장 많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미 당대에 풍수 사상이 단순한 민족 신앙의 차원에 머물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풍수를 미신적으로 생각하거나 혹은 단순히 어떻게 하면 명당을 찾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대개이다. 소위 명당터에서 태어난 인물이나 명당에 묻힌 인물의 후손들의 삶의 행적을 보면 단지 좋은 터이기 때문에 그 인물이 흥했다거나 부귀영화만을 누렸다는 기록은 없다. 인간의 삶에 양 날의 칼을 드리울 수 있는 것이 풍수이다. 본인을 위시한 후손들의 부귀와 명성은 명당, 명지의 결과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먼저 행해야 할 일은 인간의 도리를 지키는 법을 아는 것일 것이다. 그리하여 풍수가 인간의 삶을 풍성하게 해 주는 인문학이자 삶의 방향을 고민하고 이끌어 주는 철학으로서 인식되어져야 할 것이다.
목차
추천사 「우리가 몰랐던 한국사」에 대하여 - 이어령
작가의 말
제1부 풍수에 숨어 있는 선현의 지혜
풍수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풍수의 기원
시대에 따른 풍수의 변천
오늘날의 풍수
풍수의 기본 간룡법과 장풍법
물길은 어떠해야 하나
어느 곳을 향하여 좌정할 것인가
지명과 풍수 형국론
그 외의 논리 체계
일제의 풍수 침략
제2부 한양 정도定都 6백 년
조선의 5백 년 정읍지와 풍수설
신라의 고승 도선의 풍수 철학
신승神僧과 재왕지지宰王之地
국도國都의 풍수적 해석
유좌묘향酉坐卯向과 임좌병향론壬坐丙向論
앞날을 정확히 예언한 남사고
민중의 가슴에 자리한 『정감록』에 대한 신앙
국도 서울과 관련한 풍수 - 성문에 얽힌 풍수
- 누에형 안산과 뽕밭
- 새문안 교회 그리고 이숙번과 돈의문
- 풍수에 매달린 광해군의 폐해
제3부 명지 명당을 찾아가는 길
세종대왕 영릉 이장과 광주 이씨
세종과 광주 이씨 문중과의 악연
아홉 정승이 묻힌 구정승九政丞골
13명의 왕비를 배출한 명지 여주
이괄을 포함한 역적 인맥도 있었다
이천에 숨어 있는 풍수 역사의 흔적
이천이 낳은 국혼과 4대 사옥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온 남연군 유택
103년의 세월 차로 같은 터에 태어난 최영과 성삼문
책 속으로
땅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먼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측면에서 의식주라는 경제적인 용도를 중시하며 바라본 것은 풍수지리 가운데 ‘지리’의 측면에 해당된다. 예컨대 국부國富 조사를 위주로 한 조선 시대의 관찬 지리지官纂地理志나 지도학적地圖學的 전통 같은 것이 그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땅의 본원적인 성격, 다시 말해서 생명의 원천으로 우리의 삶을 있게 하였고 또 사후 우리들 영면의 거소로 생각하는, 어떻게 보면 매우 신비스럽고 비합리적일 수밖에 없는 대상으로 보아 온 것인데 이것을 풍수지리 중 ‘풍수’의 측면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중략)…
그러나 묘지 풍수의 2대 원칙
- 좋은 일을 한 가문이 길지를 차지한다.(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
- 산소의 크고 작고 장대하고 누추한 것(대소장누大小壯陋)은 문제되지 않는다.
라는 사실을 아직도 많은 사람이 망각하고 막대한 돈과 노동력을 투입하여 넓지도 않은 국토를 훼손하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제1부 풍수에 숨어 있는 선현의 지혜 中
그런데 풍수 원칙에 털끝만한 오차도 없는 교과서적인 모양을 갖춘 땅인데도 ‘생기가 없는 가짜 꽃(허화虛花)’인 땅이 있다. 그 주변 지세의 모양으로는 천하대길지天下大吉地이면서도 땅에 생기가 흐르지 않는 경우이다. 많은 평범한 지관들이 이런 땅에 현혹되어 실수를 저지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들을 용사庸師라 하는데, 이들은 자신이 배운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터를 잡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알지도 못하면서 사람을 속이는 사기꾼과는 다르다. 다만 그들은 땅에 대한 깨달음이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실수를 하는 것이다.
그 땅의 용맥이 어떤 기를 지니고 있느냐를 알아내는 일이 모양새가 좋은 땅을 찾는 일보다 우선하는 것이다. 그것을 알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심 없는 인간적 본능과 욕심을 버린 마음가짐 그리고 인륜에 어긋남이 없는 성심을 지니고 땅을 대하는 일이다.
퇴계의 말처럼 “불인不仁한 사람은 사욕에 가리고 갇혀 물아物我의 감통感通과 측은지심惻隱之心의 추급推及을 알지 못하여 유아有我의 사私를 깨트리고 무아無我의 공公을 확대하여 돌처럼 완고한 마음을 융화하고 명철하게 함으로써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의식 속에서 사의私意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런 자세가 땅의 원기를 몸속에 영접할 수 있는 태도이다. 결국 풍수도 천지의 도에 다름 아닌 것이다.
제1부 풍수에 숨어 있는 선현의 지혜 中
“그럼 어느 곳이 정혈입니까?”
하고 젊은 승려가 묻자
“사람으로 칠진데 두 손을 놀림에 바른손이 가장 긴요한 것이니 바로 오른쪽 등성이가 진혈이니라.”
하였다. 차천로車天輅의 시문집인 『오산집五山集』에서는 두 신승을 가리켜 늙은이는 나옹 혜근 선사요 젊은이는 무학 자초 선사라고 하였는데, 지세에 밝은 나옹이 당시 소년이었던 무학과 말을 주고받다 한 곳을 가리키며 왕이 되는 묘터라고 한 것이다.
이때는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李子春(환조桓祖)의 상중이어서, 이성계의 노복들과 지관이 묏자리를 얻고자 이 산 저 산 다니고 있을 무렵이었다. 때마침 바로 두 스님이 앉아 있던 옆 후미진 곳에서 잠시 쉬려고 앉아있던 이성계의 가복家僕이 이들의 대화를 모두 다 들었다. 가복은 한 달음에 뛰어와서 이성계에게 스님들 대화의 전모를 고하였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성계는 상복을 입은 채 말을 달려 함관령咸關嶺 산마루에서 두 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말에서 내린 이성계는 나옹에게 공손하게 큰 절을 하면서 가르침을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니 나옹은 어찌할 수 없이
물건은 각기 임자가 따로 있다(물각유주物各有主).
라고 하며 명당을 잡아주었는데 그 자리가 바로 왕이 난다는 자리였다고 한다. 드디어 진혈을 얻은 이성계는 아버지인 환조를 그 곳에 매장하게 된다. 이성계의 나이 26세 때의 일이다.
제2부 中 신승神僧과 재왕지지宰王之地에서
세종은 세상을 하직할 때 유언하기를
“내가 죽거든 선왕의 묘택 아래 묻어다오. 그래야 혼백이나마 아버지, 어머니께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릴게 아니냐?”
하며 간곡히 부탁하므로 아무도 그 뜻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세종의 유언대로 능을 정하고 난 이후에 일대 파란이 일기 시작한다. 세종의 22명이나 되는 아들딸 가운데 둘째 아들인 수양 대군(세조)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죽임을 당한 것이다.
…(중략)…
그리하여 세종이 안장된 지 19년이 지난 1469년 1월 30일 능을 옮기기 위하여 묘를 파기 시작하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광내壙內에 물이 가득 차 있었고, 그해 3월 6일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현 영릉)으로의 천장을 마무리하였다.
제3부 中 세종의 묘택이 몰고 온 파란에서
이인손의 묘를 파서 유해를 들어내니 그 밑에서 비기秘記를 새겨 넣은 글귀가 나왔는데, 이를 본 모든 사람들은 대경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자리에서 연鳶을 날리어 하늘 높이 떠오르거든 연줄을 끊어라. 그리고 연이 떨어지는 곳에 이 묘를 옮겨 모셔라.”
장례를 할 때 벌써 이장의 운명을 알았던 것이다.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 그렇게 하니 과연 바람에 실린 연이 서쪽으로 날아가다 약 10리쯤 밖에 떨어졌다. …(중략)… 이리하여 이인손의 묘는 현재의 영릉 자리에서 서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으로 옮겨졌으니, 그곳을 이름하여 연이 떨어졌다 해서 연주리延主里(현 신지리新池里)로 불리게 된다.
만약에 묘소의 터를 주지 않고 있었다면 어떤 일이 생겼을까 하는 생각의 여지를 남김과 처음 묘터를 잡아준 지관의 말대로 제실을 짓거나 돌다리를 놓지 않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이 우주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는 물각유주物客有主라 하여 각기 임자가 따로 있다 하였으니 정말 풀리지 않는 영원한 숙제일지도 모르겠다.
제3부 中 세종과 광주 이씨 문중과의 악연에서
그토록 기다리던 권세도 얻었지만 험악한 역사의 길목에 서있던 흥선 대원군과 고종, 순종은 과연 세력가와 군주로서 한 시각이라도 마음 편한 날이 있었을까. 흥선 대원군은 며느리 명성 황후와 권력 다툼에서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천륜인 부모 자식 간의 도리도 짓밟았고 조부 남연군의 묘소 덕분에 왕위를 얻은 고종 역시 이민족 일본에 나라를 넘겨주고 빼앗는 과정에서 심사는 얼마나 아팠을 것인가.
흥선 대원군과 명성 황후의 틈에 끼어서 어렵게 고종의 뒤를 이은 순종은 힘없는 껍데기뿐인 왕 역할을 하다가 3년 만에 519년 동안 이끌어온 한 왕조의 문을 닫게 되니 허무하고 비통하기가 이를 데가 없다. 남연군의 묘소 덕분에 그렇게 갈망하던 왕권은 얻었으나 말로가 그렇게 되었음엔 천년 가야사를 허물고 빼앗은 죗값을 치른 것처럼 보여진다. 순리를 행하지 못한 결과라는 말이다.
제3부 中 풍수로 운명은 바꾸었으나에서
성삼문이 태어난 터를 살펴보면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魯恩里를 둘러싼 삼봉산三峯山이 있고 그 산줄기인 수리봉 아래 최영사지崔榮祀地가 있으며, 이 마을 입구엔 성삼문의 유허비가 있어 최영과 성삼문 두 분이 동일한 터에서 태어났음을 알려준다. 최영이 태어났던 그 터에 성삼문의 외조부 춘천春川 박씨 박첨朴塾이 살고 있었으며, 성삼문의 어머니는 그를 잉태한 후 친정에서 해산을 하였다. 103년 세월의 공간을 두고 같은 장소에서 태어난 최영과 성삼문은 높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모두 비명에 세상을 떠나 그들이 태어난 터의 지세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최영과 성삼문 모두의 운명은 승승장구 했으나 모두 혹독한 죽임을 당했으니 인생이란 것이 참 얄궂다고 밖에 말하지 못하겠다.
제3부 中 충신 중의 충신 성삼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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