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득 채워 마시지 말기를 바라며 너와 함께 죽기를 원한다. 계영배”
일터는 하루가 다르게 곳곳에서 봄 향기가 퍼져 나온다. 어느새 마른 가지에 물이 오르고 새싹이 트더니, 작은 꽃망울까지 고개를 내보인다. 겨우내 죽은 듯 보였던 나무들도 신비롭게 푸른 빛을 보일때면 정말 봄이 왔구나 싶어진다.
어느 날,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에 작은 점 하나가 나타나 점점 커지더니 한 마리의 큰 독수리로 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새는 땅바닥에서 노는 참새 떼를 향해 힘차게 돌진했다.
참새들은 혼비백산이다. 그러나 그 중 한 마리는 동작이 굼떠, 독수리에게 일격을 강타당하며 나동그라졌다. 그 순간 독수리는 쓰러진 참새를 두 발로 움켜쥐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십여년 전 중간에 읽기를 포기했던 상도를 다시 읽기 시작했음은 그때 ‘계영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한 걸음에 도서관으로 달려 상도 5권을 품에 안고 나왔다. 예전 느끼지 못했던 임상옥이 궁금하던 답을 얻어 내 머리가 끄덕여졌다. “반드시 죽기를 각오하면 살 것이요 살기를 위한다면 죽을 것이다. 이순신”
임상옥이 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돈을 벌었으나 돈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명예를 얻었으나 명예를 누리지 않았고 풍류를 즐겼지만 쾌락을 탐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5권의 책을 5일 만에 다 읽어버렸다. 책의 구성이 현재와 과거를 오간다. 현재의 ‘나’인 화자는 자동차 바퀴에 미친 자동차 회사 회장(마치 정주영을 빙의 한듯)의 죽음을 통해 200년 전 거상 임상옥을 그린다.
이제부터 조선시대 임상옥 이야기인가 싶으면 2권에서는 다시 21세기로 돌아온다. 매 권마다 현실을 잊지 않고 기억나게 해준다.
4대째 사신 일행에 역관으로 보부상 신세였던 임상옥 집안에서 어떻게 조선최대 갑부인 거상을 배출했는지 팩션 형식의 소설은 읽는 내내 흥미를 더한다. 장미령, 석숭스님, 홍경래, 김정희 등등 문장의 서술은 그야말로 멋들어지다.
사실 상도를 읽다보면 몇백년 전과 무섭도록 현실은 닮았음을 안다. “장사는 이문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 상업이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소인은 장사를 통해 이윤을 남기지만 대인은 사람을 남긴다. 결국은 사람이다.”
최인호의 '상도'를 접하며 느낀 점은 그가 나이 들어 감이다. 상도 5권에 이르러 강해지는 종교적 색채, 좀 심하게 표현하면 불교와 천주교가 혼합된 간증과도 같은 묘사 때문에 그가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
조선시대 상인 임상옥이 가졌던 부는 신용에서부터 출발하였고, 신용을 중시했던 그 전통은 경제발전의 초창기에 우리 경제의 도약에 큰 기여를 했다. 자신에게 빚진 사람에게 오히려 금괴를 나누어 주는 모습에서는 불교에서 말하는 무소유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나아가 꼭 돈 뿐만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철학에까지도 이야기하고 있다.
마지막 책장을 덮지 못하고 곧 베어질 갈대숲을 바라보았다. "이제라도 자연의 이치대로 살자! 취할 때는 가려서 취하고 필요한 만큼만 갖자!" 매일 걷는 내 일터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느리게 걷는 게 묘미다.
보이는 정상을 향해 숨 가쁘게 오를 필요도 없고 갈 수 있는 만큼 걸으면 되는 안분지족의 길이다. 분수를 모른 채 삶의 정상을 향해 옆길도 살피지 않고 걷다가 낙마하거나, 자리보전을 위해 안간힘 쓰는 사람들에겐 삶의 지혜를 던져 주는 길이다.
꽃보다 아름다운 연초록 신록이 어우러지는 계절, 팍팍한 일상을 잠시 접고 예전 그들이 심었던 보리수 나무 아래를 걷다보면 심신에 활력이 절로 솟는다. 상도는 상인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닌 인생 전반 도리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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