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면 보고 싶다. 만지고 싶다. 느끼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대상의 실체를 온전히 품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 대상이 냄새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면?
아들밖에 모르던 노모는 80년대 시위 도중 경찰의 진압으로 아들이 죽자 어느덧 투사로 변신한다. "그동안 나도 민가협 엄마들 덕에 의식화된 것도 있고…, 죽은 우리 창환이가 살아있는 판검사보다 골백번은 더 잘나 보이더라구요."
연극배우 손숙의 연기는 좀처럼 연락하지 않는 손윗동서로부터 전화를 받으며 극은 전개된다. 무대에서 베갯잇을 꿰매는 한 여인은 무료한 일상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보편적인 중년 여성으로 비친다.
그러나 머지않아 거대한 슬픔을 꼬깃꼬깃 접어 꿰매버렸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며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려고 애를 썼으나, 생명의 실체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아무리 잘나고 출세한 남의 아들도 감히 죽은 아들과 비교할 수 없었는데, 어느 동창이 하반신 마비인 아들을 '공깃돌 굴리듯' 하는 모습을 보고 그만 한 순간에 무너져내린다.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여생을 누워 지내야 하는 아들이 엄마의 존재만을 허용하고 소통하는 것을 목도했을 때 부러움은 참을 수 없는 질투에 가까워진다.
어찌보면 간결한 이야기이지만 1980년대의 아픈 시대사와 생전에 아들을 잃었던 작가의 실제경험이 겹쳐져 묵직하게 다가온다. 개인의 아픔과 시대의 아픔은 극중 내내 시시때때로 교차하며 관객의 마음을 아프게 후빈다.
사랑하는 이를 볼 수 없다는 것. 만질 수 없다는 것. 느낄 수 없다는 것……. 이처럼 잔인한 일이 또 있을까. 이보다 더한 삶의 고통이 없다고 소설은 단언하고 있다. 손숙의 연기를 지켜본 관객 또한 고개를 가로젓지 못할 터.
소파와 테이블 등으로 아파트 거실을 묘사한 무대는 몇 가지 소품과 상황을 이해하게 하는 공중전화 박스와 배우의 심정을 강조하는 조명의 밝기밖에는 별다른 장치가 없다. 즉, 배우의 연기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작품이다.
배우는 1시간 반 동안 들리지 않는 대상과 통화하며 보이지 않는 대상을 애통하게 그리워하는 캐릭터를 복원해낸다. 책이 주는 감동을 그대로 객석에 전달한다.
배우 손숙의 노련한 호흡 덕에 아들 잃은 어머니의 아픔은 절절하면서도 절제된 채 전달됐다. 손윗동서와 전화통화를 하는 형식으로 혼자서 1시간여를 이끌어가야 하는 만만치 않은 역할을 맡은 손씨는 극중 인물이 겪는, 깊은 혼돈의 상태에 온몸을 내맡긴 채 감정의 세밀한 상처들을 하나하나 조각해냈다.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하는 장면도 잊을 수 없으나 딸이 사온 쇠꼬리를 자기 먹자고 고아내다 깜빡하고 태워버린 사건을 이야기할 때가 더 가슴을 저리게 하는 연기를 선보였다.
좀처럼 집안을 떠나지 않는 누린내의 지겨움을 토로하며, 실은 도저히 떨쳐낼 수 없는 아들 냄새로 가득한 오늘의 버거움을 한탄하는 한 여인의 고단한 시간이 스며들었다.
이 작품에는 지난해 작고한 원작자 박완서씨의 절절한 비극적 체험이 농축돼 담겨 있다. 그는 1988년 5월 남편을 잃고 석달 뒤에 25세 외아들(당시 서울대 의대 인턴)을 교통사고로 잃은 후 그 상처로 1년 정도 글쓰기를 중단하고 가톨릭에 귀의하기도 했다.
그리고 1993년 응어리진 슬픔을 1980년대 시대상황과 함께 담아 고백한 작품이 바로 소설'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다. 제목은 김현승 시인의 시 '눈물'에 나오는 문구로 '내가 마지막까지 지니고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심하게 말을 쏟아낼 때에도 허리를 접고 통곡하는 감정의 폭풍 상태를 보이도록 유도하게 하는 손숙의 깊이에 고 박완서의 작품은 다시금 빛을 발했다. 아들 잃은 작가의 거대한 슬픔은 이렇게 승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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