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
격변의 중국 근현대사, 중국의 마지막 봉건국가는 ‘청나라’다.
거대했던 청나라가 몰락했을 때, 청나라의 황제는 무엇을 했을까?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에 대해 알아보자~~.
3살짜리 꼬마 푸이, 황제가 되다
푸이,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의 이름이다.
푸이는 광서제가 서거 후, 1908년 3살의 나이로 청의 12대 황제가 되는데
당시 푸이가 황제가 된 것은 서태후의 영향이 크다.
당시 40년 넘게 청나라 황실을 지배했던 서태후는 ‘푸이’를 통해 다시, 계속해서 황실을 지배할 야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데
하지만, 서태후의 죽음 이후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났고, 신해혁명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권력을 잡은
위안스카이와와 중화민국 수장인 쑨원의 협약으로 인해 청 왕조는 멸망하게 된다.
그리고 푸이는 6살의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며, 중국의 마지막 황제가 된다.
파란만장한 푸이의 삶
황제에서 물러난 이후 푸이의 삶은 파란만장하다.
푸이는 퇴위 후에도 쯔친청에서 생활했는데, 1916년 위안스카이가 죽은 뒤부터 권력에 이용당하기 시작한다.
청 복원 세력에 의해 복권하는 듯 했지만 다시 퇴위됐으며, 1924년에는 결국 쯔친청에서 쫓겨나고 만다.
이후 아버지인 순친왕 채풍의 거처로 자리를 옮겼지만, 다시 일본 공사관으로 도피하게 된다.
일본 대사관에서 머물던 푸이는 곧 일본인에 의해 톈진으로 호송되어
일본 조계(외국인의 거주와 영업을 허가한 땅으로 치외법권이 인정됩니다)에서 머무르게 되는데
결국 푸이는 일본의 허수아비로 전락한다.
푸이, 만주국의 왕이 되다.
1931년 9월 일본 관동군은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내 만주전쟁을 일으킨다.
만주전쟁으로 중국 북동부를 점령한 일본은 1932년 3월 만주국을 세워 푸이에게 집정할 것을 요구한다.
수도는 신징, 지금의 지린성 창춘에 위치했던 만주국. 일본은 명목상 푸이에게 집정하도록 했지만,
일본의 관동군 사령관이 모든 실권을 장악해 푸이는 어떠한 실권도 없던 왕이었다.
푸이, 포로가 되다.
허수아비였지만, 왕으로 살던 것도 잠시, 소련의 참전으로 일본군이 괴멸하자 곧 만주국은 민중반란에 의해 붕괴된다.
그리고 1945년 8월 17일 소련군에 ‘전범’으로 체포된 푸이는 하바롭스크에 억류된다.
이후 푸이는 1946년에는 극동국제군사재판 때 증인으로 출두했으며, 1950년 중국으로 압송돼 푸순 전범관리소에 수감됐다.
그리고 1959년 12월 4일 모택동의 특별사면령으로 풀려난다.
밖으로 나온 푸이는 베이징의 식물원에서 정원사로 일하게 된다.
이후 정원사를 그만두고 중국을 위해 일하기도 했던 푸이 하지만, 1967년 파란만장한 삶을 마치고 신장암으로 사망한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마지막 황제’ 포스터>
푸이를 그린 영화 <마지막 황제>
황제에서 왕으로, 그리고 죄인으로, 정원사로… 푸이의 삶이 정말 파란만장하다.
이런 파란만장한 삶은 실제로 영화로 제작된다.
푸이는 자신이 전범관리소에서 썼던 반성문을 바탕으로 <나의 전반생>이라는 자서전을 정식 출간했다.
이후 이탈리아 감독인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이 자서전을 바탕으로 영화 마지막 황제를 만들어낸 것이다.
서유럽인이 서유럽인의 시선으로 그린 중국 마지막 황제의 삶은 세계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제60회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포함 총 9개 부분을 휩쓸었고, 전세계에서 흥행을 일으켰다.
황제에서 허수아비 왕으로, 포로로. 그리고 정원사로.
푸이의 삶이 마치 청나라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것 같지는 않으신가요?
푸이는 친엄마가 죽던 날에도 자금성을 나갈 수 없어 가족의 죽음조차 지켜보지 못한 불운의 황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내가 중국의 황제 였다"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은 참 먹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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