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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싶은시

봄날은 간다/기형도

by 칠면초 2018. 5. 18.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열풍(熱風)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시반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패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간다

 

여자가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엔  

하룻밤새 없어져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들어온 것들의 인사(人事)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아이를 지울 때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릴 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소읍(小邑)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세숫대야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은  

봄날이 가면 그뿐

 

숙취(宿醉)는 몇 장 지전(紙錢 )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들은  

굳은 땅 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는지


기형도 그의 쓸쓸함은 팔목에 소름을 돋운다. 일부러 쓸쓸하고지 할땐 그의 시가 제격...

무서우리만치 고용한 소읍은

아마도 내 마음일꺼야....


그래도,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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