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부터 말썽이 잦던 컴퓨터.
사람을 불렀더니 하는 말.
"참, 인내심이 강하십니다."
여기저기 손봐달란 가전들의 외침일랑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살아왔지만, 컴퓨터만은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몇 년 동안 써온 글과 사진들을 정리하고 백업시키고 시디로 굽고...
생각만 해도 머리에 쥐가 났다.
그런데 영리하고 꼼꼼한 큰 아이가 컴퓨터 본체 하드디스크를 은빛 시디 한장으로 마무리 지어줬다.
그럼에도 미처 정리하지 못한 자잘한 자료들은 눈물을 머금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작된 포맷.....몇번이나 미뤄 오던 일이지만 Yes, No의 갈림길에서 한번의 머뭇거림 없이 실행되었다.
그제서야 쏟아지는 아쉬움,
왜 컴퓨터 구석에서 별 쓸모없이 뒹굴던 몇 줄의 글들이 생각나는 것일까? 그것도 재생 불가능하게 어슴푸레하게만....
그리하여, 나의 컴퓨터는 새로운 국면에 접선하게 되었는데...
말끔해지긴 했어도 텅 비워져 어딘지 멍충이 같은 컴퓨터에 정이 가지 않는다.
눈치 없이 한창 바쁠 때에도 “잘못된 연산을 수행 중입니다” 하고선 창을 닫아 버렸던 이전의 컴퓨터가 그리워지기조차 한다.
덧붙여, 내 삶에 이런 포맷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과감히 거부해 버리겠다.
비록 초라하고 누추하더라도 지난 시절의 더께를 지고 사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이 오늘의 결론이므로...
(아끼던 내 과거)-----------------------------> (시작할 내 과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