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학의 시조 편작, 외과의 비조 화타, 상한론의 시초 장중경, 약왕 손사막, 《본초강목》의 저자 이시진이 펼치는 신화 같은 의술과 일생의 미스터리!
죽은 괵나라 태자를 되살려낸 편작에서 독화살을 맞은 관우를 살리고 조조의 머리를 쪼개 뇌수술을 하려 한 화타, 7일 주기로 병이 낫는 시기를 정확하게 예측한 장중경, 가는 실 한 가닥으로 사람의 맥을 짚어낸 손사막, 산 사람이 죽을 시간까지 맞힌 이시진까지!
낯빛만으로 사람을 살리는 망진술, 약을 쓰지 않고도 병을 고치는 정지요법, 다른 병을 같은 방법으로 치료하는 이병동치법, 음식과 잠을 다스려 장수하는 양생비법까지, 신화가 된 성의들의 죽은 사람을 살리고 불치병을 낫게 하는 귀신같은 의술의 세계!
중국 고대 명의 가운데 전설적인 명의로 추앙받고 있는 5인, 동양의학의 창시자 편작扁鵲, 외과의 비조로 불리는 의성醫聖 화타華佗, 상한론傷寒論의 시초 장중경張仲景, 약왕藥王 손사막孫思邈, 《본초강목》의 저자 이시진李時珍 등의 이야기를 중국중앙방송(CCTV) ‘백가강단’의 스타 강사 5인이 각각 한 명씩 맡아 재미있으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풀어쓴 책이다.
한의학의 명의인 허준이나 이제마처럼 이들 중국 명의의 이야기도 민간을 통해 구전되면서 전설이나 신화화된 이야기가 많다. 이들이 신의神醫나 의성으로 추앙 받는 것은 단순하게 명의이기 때문이 아니라 치병제중治病濟衆, 병을 다스리고 중생을 구원하려고 한 불세출의 의원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사료와 5인의 명의가 남긴 저작물을 통해 신화의 내용이 진실인지를 추적한다. 전문적인 내용이나 용어를 최대한 자제하고 명의들의 재미있는 일화와 실제적인 치료법, 그리고 처방에 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화제를 이끌어가는 것이 특징이다.
담장 밖의 사람을 볼 수 있는 초능력과 심장교환수술
편작 편에서는 진월인, 노의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편작의 진짜 이름은 무엇인지를 찾아나서는 동시에 기원전 7세기부터 3세기까지 생존했던 것으로 전해지는 생졸연대의 실체를 추적한다. 여기에 사람의 신체를 투시할 수 있었다는 그의 초능력과 우황의 최초 발견자, 그리고 심장교환수술을 당시에 이미 편작이 했다는 설에 대한 진실을 밝힌다.(31-35페이지)
반면 의술적 측면에서의 그의 공헌도 짚어본다. 동양의술은 《황제내경》으로부터 시작되고 동양의학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정도로 불세출의 명의인 편작. 오늘날의 진맥법은 그에게로부터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편작은 진맥의 관건이 되는 부위인 ‘촌구寸口’를 발견하므로써 진맥법을 체계화시켰다. 촌구는 진맥을 할 때 만지는 손목부위를 말한다.
편작은 또 중의학의 기초가 되는 진단법인 ‘4진법’을 창시했다. 과학적인 진단 체계로 알려진 ‘망望, 문聞, 문問, 절切’이 바로 그의 4진법을 토대로 확립된 이론이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그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로써 편작은 중국 고대 최초로 정사에 실린 의사가 되었다.
이 기록 안에서 저자는 죽어서 입관직전에 있던 괵나라 태자를 문問진만으로 살려낸 이야기(17페이지)와 낯빛만으로도 사람의 병을 읽어내는 망望진술로 채 환공의 병과 죽음을 예언한 사례(21페이지)도 자세하게 들려준다.
그의 탁월한 망진술 때문에 편작은 담장 밖의 사람을 볼 수 있는 초능력을 가졌고 그래서 오장육부를 투시하는 능력이 있었다고 전해졌다는 해석이다.
또 오늘날 전해지는 편작전설은 여러 명의의 일화가 흡수된 것이 대부분이며 당시의 중국에서는 의료 체계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라 병이 생기면 무당의 주술로 치료하려고 했는데 편작의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의醫가 무당의 주술에서 분리되어 확립된다. 편작은 의료 체계를 확립하여 진보적인 지식인이 되었고 이를 시기하던 의원인 태의령 이혜에 의해 허무한 죽음을 맞았다.
세계 최초의 마취제 마비산과 중국 역사 최초의 복강수술
중국인들 사이에서 사회적 약속처럼 쓰이는 말이 있다. 자신을 구해준 의사에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감사의 뜻을 전할 때, ‘화타재세華佗再世, 묘수회춘妙手回春’이라는 여덟 글자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중국 고대의 수많은 명의 가운데 후대 사람들은 왜 하필 고명한 의술을 칭찬할 때 ‘화타재세’라고 말하는가?
화타는 손권의 휘하에 있던 무장 주태周泰를 치료하고, 독화살을 맞은 관우의 팔에 외과수술을 단행하여 독을 제거했으며, 조조에게는 뇌수술을 주장했던 중원 최고의 명의였다.
사서에 기록된 사례들을 살펴보면 화타의 의술은 감탄스럽다. 병을 예측하고 생사를 미리 아는 능력(51-54페이지), 기침을 하고 피를 토하는데 폐가 아니라 창자에 원인이 있다고 진단하거나 아이가 병에 걸렸는데 엄마에게 약을 처방하는 사례(55-58페이지) 등 현대 의학에서 시행되는 치료법의 근간이 이때 이미 만들어졌음을 보여 준다.
《삼국지》와 《후한서》에는 또한 약을 쓰지 않고도 환자의 병을 치료하는 신기한 의술이 기록되어 있다. 병이 난 한 군수가 화타에게 진료를 청했다. 화타는 군수의 안색을 살피더니 크게 화를 내야만 치료되는 병임을 알아챘다. 이에 화타는 군수에게 엄청난 액수의 치료비를 그것도 여러 차례나 요구하며, 주지 않으면 병을 고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런데 화타는 돈만 챙기더니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떠나기 전에는 편지 한 통까지 써서 군수를 실컷 욕했다. 단단히 화가 난 군수는 부하들을 시켜 화타를 쫓아가 죽이라고 명한 다음 검은 피를 몇 되나 쏟더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군수의 아들은 화타가 아버지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이 방법을 쓴 것을 알고 급히 달려가 화타를 죽이라는 명을 거두었다. 크게 화를 내어 병이 완치된 사례라 할 수 있다.
중의학에서는 사람에게 희喜, 노怒, 우憂, 사思, 비悲, 공恐, 경驚의 일곱 가지 감정인 ‘칠정七情’이 있다고 여긴다. 사람의 칠정이 자극을 받으면 몸에서 반응을 일으키는데, 중의학에서 이를 ‘정지요법’이라고 부른다. 인체가 너무 심한 자극을 받으면 평형이 무너져 병이 생기게 되는 것. 제왕의 병이 바로 이런 자극으로 생긴 것이어서 다시 한 번 자극을 주면 그의 신체 내부가 평형을 되찾아 병이 치료되는 것이다.
화타는 세계 최초의 마취제 마비산을 발명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는 《삼국지》와 《후한서》에도 기록되어 있다.《후한서》에 따르면, 화타가 마비산이라는 약을 발명했는데 복강수술을 할 때 이 약을 술에 타서 환자에게 먹였다. 그러면 환자는 술에 취한 것처럼 지각을 잃는데 이 때 화타는 배를 갈라 수술에 들어갔다. 예를 들어 창자에 문제가 있다면 짓무른 창자를 가위로 잘라내고 나머지 창자를 잘 봉합한 다음 배를 꿰매고 그 위에 신고神膏를 바르면 며칠 후 상처가 아물게 된다는 얘기다.
저자는 이것이 정사에 실린 중국 역사상 최초의 복강수술이며 이 때문에 사람들이 화타를 외과의 비조鼻祖로 여기고 있다고 설명한다.
조조와 화타의 죽음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화타의 죽음이 간웅 조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여기고 있다. 조조는 이 때문에 천고의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조와 화타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인재라면 이유를 불문하고 반겼던 조조가 왜 천하의 명의를 죽인 것일까? 혹자는 화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도 하고, 화타가 조조를 협박하다가 죽음을 맞았다는 견해를 제시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역사 속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조조와 화타, 하나는 난세의 효웅이요 하나는 떠돌이 의사로, 둘 사이에 별 관계가 없어 보이는데 화타는 왜 조조의 손에 죽음을 맞게 되었을까?
저자는 화타의 죽음과 관련해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 《삼국연의》의 기록을 제시한다. 조조가 두통이 심해지자 화타를 청해 진료를 맡긴다. 진료를 마친 화타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병의 근원이 뇌 속에 있으니 먼저 약을 복용하여 마취시킨 후 날카로운 도끼로 머리를 가른 다음 병의 근원을 제거해야만 두통이 사라질 것입니다.”
조조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화타의 치료법에 살기가 숨어있다고 생각한다. 즉 화타가 이를 핑계로 관우의 복수를 하려든다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크게 노해 화타를 감옥에 가두고 곧 죽여 버린 것이다.
많은 영웅들을 치료하던 명의였지만, 정작 화타는 벼슬이나 명예, 재물에는 관심이 없었다. 조조가 그를 의심하여 처형할 때까지 화타는 천하를 편력하여 의술을 익히고, 걸인들과 형편이 어려운 백성들의 병을 고치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가 의성이라고 불리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화타는 인술을 펼쳤던 의성이기 이전에 동양 의학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명의였다. 세계 최초로 마취제를 발명하는가 하면, 양생법 중의 하나인 오금희를 창안하였고, 제자들을 양성하여 자신의 의술을 전수시켜 동양 의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동병이치와 이병동치
장중경은 수많은 백성들이 전쟁과 역병으로 죽어 나가고, 자신의 친척들이 병마에 목숨을 빼앗기는 상황을 눈을 빤히 뜨고 지켜보았다. 그래서 의사가 되었지만 오히려 자신의 무능함에 탄식만 나올 뿐이었다. 명의를 필요로 하는 동란의 시대에 장중경은 의술을 더욱 깊이 연구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뛰어난 의지력과 지혜를 바탕으로 마침내 경전이 되는 의서를 저술하여 후대에 귀중한 재산으로 남겼다. 《상한잡병론》이 세상에 나오자 임상학의 기초가 다져졌다
저자는 장중경이 중의학에 세운 공헌 가운데 하나로 개인의 특성에 따라 처방을 달리하는 개체화 치료법을 창시했다는 점을 든다. 이 치료법은 현재 중의학계에서 말하는 ‘변증론치辨證論治’이다. 이에 따르면 어떤 때는 같은 증상에 다른 처방을 내리고, 또 다른 증상에는 오히려 같은 치료법을 쓴다. 왜 그럴까?
저자는 본인이 경험한 천식환자를 사례를 통해 개인의 특성에 따라 처방이 달라지는 개체화 치료법을 설명한다.(105-112페이지) 또 《상한잡병론》에서 가슴이 답답한 증상을 보인 환자와 복통 환자에게 장중경이 ‘소건중탕小建中湯’이라는 똑같은 처방을 내렸으며, 모두 치료 효과가 뛰어났다는 사례를 풀어준다. 이것이 바로 ‘이병동치’의 사례이다. 하나는 방사선성 장염, 하나는 찬 것을 과식한 후 생긴 위염, 하나는 혈관신경성 두통, 이 세 가지는 각기 다른 병이지만 의사의 변증으로는 간위 양한, 수액 대사의 불균형, 음한 사기 역류에 속하므로 모두 오수유탕으로 치료가 가능했다는 것.
7일 절률의 법칙
만일 의사가 이 병은 몇 날 몇 시에 낫는다고 말한다면 믿을 수 있을까? 장중경의 《상한잡병론》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외감풍한外感風寒은 치료하지 않아도 합병증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보통 7일이면 자연 치유된다. 7일에 낫지 않았다면 병의 경과가 14일, 21일 등 7의 배수로 이어진다.” 이 규칙을 ‘7일 절률節律’이라 부른다. 현대과학에서도 인체에 분명 생리, 병리의 시간 절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했지만 이 절률을 조절하는 요소가 무엇인지는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중의학에서는 ‘천인상응天人相應’으로 이를 설명한다. 천인상응은 중의학에서 기초가 되는 관점이다.
절률은 규칙적인 시간 법칙을 이른다. 예를 들어, 감기를 치료하지 않아도 7일이면 자연 치유되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병의 경과가 길어지면 낫는 때는 7의 배수인 14일이나 21일이 된다. 이것이 바로 ‘7일 절률’이다. 그러나 다른 병에 걸리거나 합병증이 생기면 이 규칙은 적용되지 않는다.
중의학에서는 인체의 생리 및 병리의 시간 절률이 대자연이 제어해서 나타난 것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주야 절률은 24시간, 월 절률은 28일, 사계 절률은 1년인데, 유독 사람 병의 절률은 왜 7일인 걸까?
7일 절률은 물론 월 절률, 연 절률을 막론하고 모두 인류와 대자연이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설명한다. 그래서 대자연의 시간 절률이 인체의 생리와 병리의 시간 절률을 제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천인상응의 관점을 구성한다.
사람에게는 왜 오장이 있을까? 자연계의 모든 만물에는 왜 ‘생生·장長·화化·수收·장藏’의 생명 절률이 있으며, 사람에게는 왜 ‘생生·장長·장壯·노老·이已’의 생명 과정이 있을까? 이는 대자연의 오행이 인체에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그러므로 음양학설과 오행학설은 하늘을 알고 땅을 알고 인체 생리, 병리 활동을 아는 데 중요한 학설이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오행은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 다섯 가지를 가리킨다. 중의학에서는 이를 대자연 및 인체의 건강과 연관시켜 중의학의 독특한 이론을 형성했으며, 오랜 세월 동안 중의학 이론과 임상실험의 기초로 활용하고 있다.
가는 실 한가닥으로 짚어낸 맥진의 진실
시대의 명의 손사막은 의술이 정밀하고 뛰어났을 뿐 아니라 의덕 또한 숭고했다. 그는 살아서 백성들의 경앙을 받았고 동시에 황실에서도 존경을 받았다. 당 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은 “위대하고 훌륭한 백대의 스승이로다!”라는 시를 지어 그를 칭송했다.
그는 수당隋唐 시대의 저명한 의약학가醫藥學家로 ‘약왕藥王’이란 미칭을 얻었다. 그가 저술한 《비급천금요방備急千金要方》과 《천금익방千金翼方》은 합쳐서 《천금방千金方》이라고도 불리며, 중국 최고의 임상의학 백과전서라는 영예를 얻었다.
저자는 중국 역사상 수많은 의사가 배출되었지만 역사서에 이름을 남긴 이는 몇 명 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평민 출신의 손사막은 그중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려 ‘약왕’이라는 명성을 누렸다. 그렇다면 일개 평민 의사는 무엇에 힘입어 역사에 길이 빛날 명의가 되었을까? 그리고 그 안에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또 민간에서 의술을 행하던 의사가 어떻게 당나라 초기 제왕과 장상들의 목숨을 구하게 되었을까?
손사막이 실을 통해 당 태종 이세민의 정부인 장손황후를 진맥한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그러나 조금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실 한 가닥으로 맥을 짚는 게 가능한 일일까, 또 맥을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북경의 4대 명의 가운데 으뜸인 시금묵 선생이 1968년에 한 답변이다.
“사실은 궁에 들어가 먼저 태감太監(내관)들에게 이 공주나 후궁이 무슨 병에 걸렸는지, 또 무슨 증상이 있는지 물어본다네. 질문이 끝나면 치료는 끝난 셈이지. 하지만 맥을 짚을 때는 최대한 진지한 표정을 지어야 해. 사실 머릿속으로는 처방을 생각하고 있지만 말이야. 처방이 나왔다 싶으면 ‘아, 알아냈습니다’라고 말하고 약을 지어주는 것이네. 망·문聞·문問·절 중에 절이 마지막 단계인데 고명한 의사들은 문問에서 모든 걸 알아내 굳이 절까지 갈 필요가 없지. 원래는 이렇게 된 일일세.”
파로 배뇨곤란증을 치료하다
사실 손사막이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한 사례는 매우 많다. 예를 들면 《비급천금요방》 중에는 태어나면서 소리를 내지 못하여 가사상태에 빠진 아이들에 대한 많은 구급처방이 나와 있다. 또 대파 대롱을 이용하여 배뇨곤란증 환자의 오줌을 터 주어서 환자가 사망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한 사례도 나와 있다.
(중략)다음날 아침 손사막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환자의 배는 심하게 불러 있었다. 걱정이 된 환자가 손사막에게 말했다.
“선생님, 제 배를 좀 보십쇼. 도대체 무슨 병에 걸린 겁니까? 제자 분은 융폐라고 하던데요.”
“걱정 마시고 여기 누워보시오. 그리고 너는 가서 밥을 지어라.”
제자가 밥을 지으려고 파를 까는데, 손사막이 파를 가져오라고 말하더니 가위로 한쪽을 뾰쪽하게 잘랐다. 그러고는 그 파를 환자의 요도 안으로 찔러 넣더니 입으로 훅훅 부는 게 아닌가. 그러자 신기하게도 환자의 배가 금세 홀쭉해졌다.
저자는 손사막이 이 일화를 기록할 때 너무나 간단히 기술해 처방에 대한 지식을 얻기가 매우 어렵다고 설명한다. 다만 《비급천금요방》 권20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진액이 통하지 않으면 파 줄기 앞부분을 뾰쪽하게 해 음경陰莖의 구멍 안으로 세 치 깊이 정도 집어넣어 입으로 살짝 불어준다. 그러면 진액이 크게 통해 곧 낫는다.”
이런 것 이외에 흔히 보이는 질병들에 대한 연구와 치료에서도 똑같이 온갖 방법을 궁구하여 독창적인 방법을 찾았다. 예를 들면 사람들로 하여금 비타민 A가 비교적 풍부한 동물의 간을 먹게 하여 야맹증을 치료하였다. 양의 목 부위 고기를 먹게 하여 갑상선종도 치료했다. 살구씨, 수유 등으로 각기병脚氣病을 낫게 하는 등 여러 사례가 많았다.
손사막은 늘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사방으로 다니면서 의료행위를 하였고 또 고개를 넘고 절벽을 기어오르면서 약재를 채집하여 직접 햇볕에 말려서 가공하여 긴급한 수요에 대비하곤 하였다. 손사막의 이러한 부단한 외부활동이 한편으로는 그가 건강하게 장수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훌륭한 의사가 갖춰야 할 덕목
손사막은 《비급천금요방》에서 훌륭한 의사가 갖춰야 할 의덕醫德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손사막은 가장 먼저 조금도 소홀하지 않는 성실함을 강조했다. “병을 살피고 진단하는 데 지극 정성을 다하고, 병의 결과를 알아내거나 약을 처방하는 데 있어서 조그만 실수도 저질러서는 절대 안 된다.” 두 번째는 귀천을 따지지 않고 누구나 차별 없이 대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더럽고 냄새나는 것을 피하지 않아야 한다. 위의 세 가지가 의사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물론 그 뒤에 겸손하고 신중할 것, 박학다식할 것, 절대 자만하지 말 것 등 여러 가지가 나온다.
10년 과거공부 끝에 의사의 길로 나서다
1518년, 이시진은 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할아버지 때부터 의사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영의鈴醫였는데, 영의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방울을 흔들어 환자를 찾아 치료해주던 의사를 가리킨다. 당연히 그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낮았으며,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았다.
이시진은 과거시험에 여러 차례 떨어지고 스물세 살의 나이에 의술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전염병과 싸우면서 의사의 길로 접어든 셈이었다. 천재와 인재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다행이 천재를 피했다 싶었던 백성들은 또 다시 전염병을 만나 목숨을 잃었다. 특히 피해가 심한 지역의 백성들은 재해와 전염병을 피해 살던 곳을 떠나 사방으로 도망을 갔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무료로 치료를 해주고 약도 주었지만, 불로장생을 꿈꾸는 권세가들에게는 비굴하지도 또 거만하지도 않으면서 교묘하게 그들을 농락했다. 이 덕분에 이시진은 민간에서 칭송이 자자했다.
‘본초’를 손볼 꿈을 꾸다
하지만 이시진의 이름이 청사에 남게 된 진짜 이유는 바로 그가 편찬한 《본초강목》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인연으로 ‘본초’를 다시 손볼 꿈을 가지게 된 것일까?
이시진은 고대 ‘본초’ 저작물 안에 오류가 상당히 많음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것은 서로 다른 약물을 하나로 뭉뚱그린 것도 있었다. 예를 들어, 인삼과 당삼黨蔘은 완전히 효과가 다른 두 가지 약물인데 한 가지로 취급되고 있었다. 또 어떤 것은 한 가지 약물인데 여러 가지로 잘못 나눈 것도 있었다. 구기자는 생산되는 지역에 따라 외관상 큰 차이를 보인다. 그래서 이를 서로 다른 약물로 여겼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약물의 치료 효과를 엉뚱하게 기술하게 되고, 또 그림과 글이 전혀 맞지 않게 된다. 그림에는 이 약물을 그려놓고 실제로는 다른 약물의 내용을 적어놓는다면 골치 아픈 일이 발생하게 된다. 이를 개선하지 않으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여 환자가 목숨을 잃는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이시진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이를 수정하기로 마음먹게 된다. 1552년, 그는 서른다섯이 되던 해에 병원 문을 잠시 닫고 모든 힘을 ‘본초’를 수정하는 데 쏟기 시작했다.
죽은 사람을 살리고 산사람이 죽을 시간을 맞히다
이시진은 《본초강목》 편찬을 위해 각지를 돌아다니며 조사를 진행했다. 그는 깊은 산 속 원시림까지 들어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또 떠돌이 의사나 농민에게까지 자문을 구해, 모든 약초에 대해 꼼꼼히 조사했을 뿐 아니라 수많은 민간 약방을 수집했다. 이렇게 각지를 떠돌던 이시진은 가는 곳마다 신비한 이야기들을 많이 남겼다.
이시진이 조사를 떠날 때 잠시 머물렀던 곳인 강서성江西省과 안휘성 경계에 있는 호구湖口라는 지역에서 널리 전해지는 이야기다. 이시진이 조사 차 길을 가던 도중에 출관하는 사람들 무리를 보게 된다. 그들은 모두 비통한 표정으로 관을 짊어지고 묘지로 묻으러 가는 중이었다. 이때 이시진은 관 밖으로 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본능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다. 자세히 보니 그 피는 어혈이 아니라 신선한 피였다. 그는 즉시 사람들 앞을 가로막고 관 속의 사람이 죽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관에는 난산으로 피를 너무 많이 쏟아 이미 죽은 부녀자 시체가 있다며 지나치려려 했다. 그러자 이시진은 안에 있는 사람을 살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이까지 낳을 수 있게 해주겠다고 장담한다. 그들이 이미 죽었다고 여기는 여자를 꺼내자 이시진은 먼저 안마를 해 여자의 근육을 풀어준 다음 명치에 침을 놓았다. 그러자 잠시 후 여자가 거짓말처럼 깨어났다. 그리고 뱃속의 아이까지 죽지 않고 건강하게 태어났다.
산 사람이 죽을 시간
이시진이 죽은 산모를 살린 이야기가 이 지역에 널리 퍼지자, 사람들은 아주 신통한 의사 하나가 이 일대에 나타났다고 수군거렸다. 어느 날, 이시진이 한 마을에 도착했는데 모두들 그를 알아보고 서로 먼저 안색을 봐달라는 둥, 맥을 짚어달라는 둥 부탁했다.
마침 옆에 약방 하나가 있었는데 약방 주인의 뚱보 아들이 계산대 안쪽에서 밥을 먹다가 북적이는 인파를 헤치고 이시진 앞까지 나와 반갑게 인사하며 맥을 봐달라고 청했다. 이시진은 맥을 짚어보고 나이도 어린데 3시진時辰(1시진은 두 시간)후에 죽겠다고 말한다. 청년은 이 말을 듣고 버럭 화를 냈다.
주위 사람들 역시 이시진이 너무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시진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그가 마을을 채 빠져나가기도 전에 그 뚱보청년이 급병에 걸려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어떤 사람이 좀 전에 이시진이 한 말을 기억하고 그에게 달려가 어찌된 영문인지 물었다. 그러자 이시진이 대답하길, “아주 간단합니다. 그 젊은이는 밥을 먹고 있는 중이었는데, 밥도 많이 먹고 술도 많이 마셨습니다. 그 상태에서 높은 계산대를 기어 내려와 죽어라고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나왔으니 창자가 이미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것이지요. 그가 제 앞에 왔을 때는 이미 손쓰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3시진밖에 살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독특한 분류법을 가진 ‘1596년에 출간된 중국 백과전서’
이시진은 18년이란 긴 시간 동안 전국 각지를 다니며 약초를 조사했고, 또 10년 동안 두문불출하며 원고를 세 번이나 다듬었다. 그리고 마침내 ‘본초’를 새로 쓰겠다는 염원을 이루었다. 《본초강목》에는 1천8백여 종의 약물과 1만1천여 가지 처방이 수록되어 있다. 이시진은 이 많은 약초와 처방을 어떤 기준으로 분류했을까?
그는 기존의 분류법을 무시하고 16부部 60류類라는 독특한 분류법을 개발했다. 이는 훗날 과학계에서도 감탄할 만큼 매우 정밀했다. 그는 약물을 수水부 4류, 화火부 1류, 토土부 1류, 금석金石부 4류, 초草부 10류, 곡穀부 4류 등으로 나눈 다음, 1천8백여 종의 약물을 부문 별로 나누어 배치하고 여기에 1만1천여 가지 처방을 첨가했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마침내 이를 완성한 이시진. 그러나 그때 이미 가산을 모두 탕진하여 《본초강목》을 출간할 돈이 없었다. 이시진의 가장 큰 바람은 《본초강목》을 하루 빨리 출간해 세상에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시진은 책을 출간하는 것이 책을 편찬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시진은 희망을 가득 안고 왕세정을 찾아가 서문을 부탁했지만 서문이 나오기까지 무려 10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1590년, 마침내 이시진에게 바라고 바라던 소식이 전해졌다. 남경의 장서가이자 출판가인 호승룡胡承龍이 《본초강목》 각인刻印을 응낙한 것이다. 그러나 책은 인쇄에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이시진은 더 이상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그만 병으로 쓰러졌다. 이 이후 ‘의성’은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고 마침내 1593년, 이시진은 향년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니다. 《본초강목》이 1596년에 출간되었으니, 그가 죽은 지 3년 후의 일이다.
한편 영국 학자들 가운데 《본초강목》에 가장 뜨거운 반응을 보인 이는 다름 아닌 다윈이었다. 그는 《본초강목》을 칭찬하며 ‘1596년에 출간된 중국 백과전서’라고 칭했다. 《본초강목》의 가치가 약물학 혹은 의학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분야에 걸친 백과사전이라고 인식한 것이었다.
다윈은 진화론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사육동식물飼育動植物의 변이The Variation in Animals and Plants under Domestication》라는 책에서 이시진이 닭의 품종을 7가지로 분류한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이밖에도 다윈의 저서에 《본초강목》이 다수 인용되었다.
이 책은 종래의 다른 본초학을 대신할 수 있는 대표적인 약물학책으로 일어, 독어, 영어, 불어 등 각국어로 번역되어 전세계 의약계에 기여했다.
지은이 및 옮긴이 소개
지은이
쑨리췬孫立群_ 1950년 4월 천진天津 출생. 남개南開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이 학교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중국 고대사 연구에 매진하고 있으며, 역사 교재 편찬에도 참여했다. 대표작으로는 《중국 고대 사인士人의 삶》, 《진나라 정계의 두 거물, 여불위와 이사를 해부하다》 등이 있다.
왕리췬王立群_ 1945년 3월 안휘성安徽省 곽산현霍山縣 출생. 하남河南대학 문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며, 중국 《사기》연구회 고문·중국 《문선文選》연구회 부회장을 겸임하고 있다. 오랜 기간 중국 고대문학과 중국 고전문헌학의 연구와 보급에 힘쓰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왕리췬 교수의 《사기》 읽기’ 시리즈가 있다.
하오완산郝萬山_ 1944년 출생. 북경 중의학원 중의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북경 중의약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중의학술연구회 부회장, 중국 음악치료학회 상무이사 등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하오완산의 상한론 강의》 등이 있다.
지롄하이紀連海_ 1965년 출생. 북경에서 태어나 북경사범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했다. 오랫동안 고등학교 역사 교사로 활동하며 중국 역사 알리기에 힘쓰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역사 속의 화신和珅》, 《역사 속의 도르곤》 등이 있다.
첸원중錢文忠_ 1966년 출생. 복단復旦대학 사학과 교수. 그는 또한 화동華東사범대학 동양문화연구센터 연구원 겸 북경 전영電影학원 객좌교수로 활동 중이다. 중국에 몇 안 되는 산스크리트어 및 팔리어 전문가이기도 하다. 대표 저서로는 《현장玄奘 서유기》, 《삼자경三字經 강독》, 《천축과 불타》 등이 있다.
옮긴이
류방승_ 성균관대학교 중어중문과를 졸업했다. 현재 중국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며, 편집 일선에서 중국의 좋은 책을 소개하는 데 힘쓰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다빈치의 두뇌 사용법》《수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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