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마흔살이 되던 그 해 가을과 겨울사이의 어느 날
갑자기 밀려오는 당혹감이 있었다.
4자가 주는 초조함이랄까? 불과 열 달 전에는 3자가 붙었었는데 하는 아쉬움...
지금 돌이켜보면 참 심하게 불혹을 맞이했다.
그 기분은 뭐랄까...
준비도 없었는데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 , 맞아 소나기를 맞은 기분이었다.
어떻게 하든 비를 피해보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지만 옷도 머리도 결국 젖어버리고 어느 처마 밑에서 망연히
내리는 비를 그저 바라 볼 수밖에 없는 그런 나날들.
그리고 몇 해가 또 흘렀다.
4자라해도 3자 쪽 보다는 5자 쪽에 가까워 진 어느 날,
내 몸과 옷은 이미 완전히 젖어 이젠 비를 피하는 것에 의미가 없어졌다.
그냥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받으며
길가 고인 물에 발을 담가 첨벙첨벙 걷는 게 편하던 시절,
어쩌면 차라리 그것이 잘 된 거라는 마음이 들었다.
결국은 다 젖을 것이었는데 어떻게든 피해보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안타까운 수고는 안 해도 될 터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4자도 떨어지고 한 달 후엔 5자가 붙는다.
겨울 웅크린 몸으로
아침마다 욕실 거울에서 한 여자를 만난다
헝크러진 머리에 눈꼽 끼고 충혈 된 눈...
방금 잠에서 깨어났건만 얼굴은 늘 피곤에 절어있다.
마흔이 넘으면 자기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는데...
도무지 책임감 느껴지지 않는 한 여자의 얼굴이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본다.
중간결산이랄까?
인생 전체를 본다면 아직 이른 감이 있지만 사십년 넘어 오십년 남짓
이 즈음까지의
대차대조표를 정리하고 싶다.
이만큼 살아오면서 얻은 것과 잃은 것...
인생의 대변과 차변....^^
얻은 것...참 많았다. 가정을 이루었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키워왔고...
좋아하는 일을 하며 부끄럼 없이 성실하고자 노력해 성취한 스스로의 자부심...
차변, 잃은 것...내가 잃은 것...
늘 그렇듯이 얻은 것은 구체적이지만 잃은 것은 매우 추상적이다.
내가 무엇을 잃었을까....
설레임...
새로운 사람, 새로운 일... 늘 가슴에 퍼지던 설레임을 기억한다. 그 두근거림을...
모든 것에 익숙해져버린 지금 어떤 새로운 사람이, 어떤 새로운 일이 내게 감동을 줄까...
차변의 제1항목은 설렘이다.
특별함...
특별한 사람, 특별한 일, 특별한 관계... 하다 못해 특별히 좋아하는 노래,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 특별히 좋아하는 색깔....내게 특별한 것이 참 많았는데...
차변의 제2항목은 특별함이었다는 생각이다.
비밀...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조금씩 더 나를 공개한다는 것일까?
완전히 오픈된 나는 지금 무슨 비밀이 있을까...
내 주변에서 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일까...
차변의 제3항목은 비밀이었다.
내게 설렘을 주고 특별하며 비밀스런 존재...
그런 대상이 내게도 있었으면...내 머리가 아니라 내 가슴이 원하는 그런...
어떤 이의 간절한 염원과 기도처럼 내 간절한 그리움이 신앙처럼 전해질 대상...
대상을 잃었다.
바보 같은 마음으로 아무도 몰래 깊은 산 속에 땅을 한 평 살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나 밖에 모르는 땅 한평.... 이따끔 찾아가 풀도 뽑고 어루만지기도하고...
잠자리에 누워서도 일을 하다가고 문득 그 땅을 생각하고 다음에 찾아가 심을
꽃나무도 생각하고...
그러면서 몰래 미소짓고...그런 나만의 땅.
겨울의 한 복판에서 깊어가는 고독은 '밥을 먹으며 죽어있음'을 깨닫게 하고야 만다.
*'밥을 먹으며 죽어있음을 알았다'는 고 박경리 선생의 시 제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