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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이십삼

답이 안 보일 때는 내 장례식을 떠올려보라

by 칠면초 2009. 9. 4.

 

 

 

그가 떠났다.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듯이 정치인은 그래야 한다며, 머리 좋은 정치인이 보기에는 무모하기 그지없는 길을 택해오던 그가 결국 떠났다. 그가 얼마나 정치를 잘했는지 대통령으로 평점이 어떠한지 나는 잘 모른다. 여기에서는 그저 인간으로서의 그의 모습을 말하려 한다. 대통령을 지낸 이력을 지울 수 없으니 결코 개인적인 평가만으로 제한할 수 없는지 모르지만, 그냥 한번은 우리 모두 그래주면 어떨까 싶다.

그는 지독한 정치판에서 살 수 있을 만큼만 순진했다. 순수하되 순진하지는 말지…. 그는 참으로 미련하다 싶다. 그래서 그에게 붙은 별명이 ‘바보’다. 그런데 그는 그 별명이 가장 좋단다. 끝까지 순진하다. 그는 정치인의 진정성은 알았지만 살아남는 방법을 알지는 못했다. ‘대통령 힘들어서 못해 먹겠다’는 세상이 놀랄 말을 서슴지 않고 할 만큼 순진했던 그는 결국 떠났다.

 

나는 요즘 사람을 만나면 이 문제로 늘 싸운다. 나는 죽은 사람을 두고 객관적인 말을 하지 말자고 말한다. 그래서 전직 대통령이 죽어선 안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과 맞서게 된다. 그들이 미웠다. 그러나 그들 역시 한 나라의 대통령까지 하고도 스스로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을 확인시켜준 그에게 야속함을 느끼는 것 같다. 이제 그들이 밉지 않다. 어쩌면 그에게 더 큰 것을 기대했다는 것을 알기에 끝내 그들을 미워할 수가 없다. 가족을 가진 이도 스스로 죽으면 안 된다. 그에게는 더 많은 식구들이 있었으니 잘한 건 당연히 아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어느 그룹회장은 무작정 봉하마을로 갔다고 한다. 그의 영정사진을 보니 그저 눈물이 났다고 한다. 다섯 시간 반을 달려간 만난 그에게 그는 무작정 미안하다고 했단다. 그는 노사모도 아니고 오히려 기득권 세력에 속한 사람으로 그를 적잖이 미워하며 지내던 사람이다.

 

갑자기 그 회장이 좋아졌다. 아니, 내가 그동안 그 회장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했던 이유가 갑자기 명확해졌다. 최소한 그는 한 사람의 죽음을 객관적인 사건으로 보려하지 않았다. 전직 국가 원수 운운하며 국민들을 망신시켰다고 흥분하지 않았다. 그저 ‘얼마나 힘들었으면...’ 하면서 떠나간 한 인간을 위로했다. 나 역시 떠난 그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냥 그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인 것 같아서다.

 

그가 꿈꾸던 미래는 무엇이었을까. 유기농 쌀? 친환경 사업? 그토록 가난했던 그가 대통령까지 지내고 고향에 돌아왔을 때 그는 가장 행복하다고 했었다. 언론에서 보여주는 당시 그의 얼굴만 봐도 그게 진심임을 알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냥 작은 마을 이장쯤 했으면 어땠을까. 아니면 그냥 유능한 사회사업가였다면 어땠을까? 그가 작다는 것은 아니다. 그냥 그만큼 했더라면 그가 조금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이제야 500만이 그를 찾는다. 미안하다고 한다. 그를 미워했었지만 이제 그의 진실을 조금은 알겠다며 운다. 살아생전 색안경을 끼고 바라봤던 게 미안하단다. 색안경 탓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아무튼 그는 옳다고 생각하면 망설임 없이 말하고 행동했다. 그래서 거칠었다. 보수적인 우리에게 그저 낯설기만 했다. 때로 불편했다. 때로 그는 지나치게 솔직하거나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여 사람들을 당혹하게 했다. 그래서 점점 등 돌리는 이도 많았다 그도 알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순진함이 오해를 불렀다.

 

그는 사람들의 오해를 참 많이 받았다. 자라는 내내 이방인이었던 그는 여의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더 심했다. 그에게는 푸른색 지붕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은 그 현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많은 이들이 어이없어했다. 흑인이 그 대단한 미국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시대적 발전이고 의식의 개혁이라고 하면서도, 그가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된 것은 오류이고 혼란이라면 한탄했다. 여론의 장난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떠나고 나서야 사람들은 그를 향한다. 생전에 전하지 못한 안쓰러움과 미안함을 전하려 찾아간다. 그냥 방관과 외면이 미안하단다. 그래서 그냥 눈물이 나는 거라고 말한다.

 

하루는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덕수궁 앞의 분향소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두 시간 넘게 내리는 빗속에서도 아무 흔들림도 없었다. 그 풍경을 보고 얄팍한 언론은 의아해 한다. 그들에겐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인 게 당연하다. 시민들은 말한다. “그 새벽, 그 심정으로 떠난 분도 있는데, 이 비요?” 하며 어이없이 웃는다. 난 그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를 숭배해서가 아니고 내가 참 모르던 누구의 죽음에 우리는 그저 잠시 낮아져야 하지 않을까. 형식적으로라도 하는 그 묵념처럼 잠시 고개를 숙일 일이다. ‘어떻게 그럴수가.....’보나는 ‘오죽했으면....’이라고 말하며 그를 보내는 게 좀금더 맞는 일 아닐까. 이미 머리를 자르고 온 사람에게 잘라버린 머리에 대해 그리 가혹한 평가는 말아야 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에 가혹하여 무엇하나. 그 누구도 가족이 있는 한 스스로 단절하는 삶은 참으로 힘든 싸움이고 진정 어찌할 수 없는 아픔의 끝이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의 대단한 그 누구에게든 그 정도의 연민과 안쓰러움을 갖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더한 경우를 들이대며 그를 그저 지독히 나약한 인간으로 만들어야만 직성이 풀일 일은 아니라고 본다.

 

500만이 그를 찾은 이유? 살아생전 내내 그를 공격하던 언론은 그의 소탈함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 ‘영원한 서민 대통령’이라고 헤드라인을 잡는다. 그 정도라면 그는 편히 떠날 수 있을까. 언제부터 우리 세상이 소탈함에 가치를 두고 인간적인 것에 결국 질 수박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이제야 멋을 부리며 그런 말을 한다.

 

바보같이, 세상이 그대로를 믿어줄 것으로 여기던 그 바보가 공식적으로 마지막 언론에 비치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검찰청을 향하던 그의 마지막 서울 나들이. 난 그 표정이 너무 슬프다. “국민 여러분께 면목 없습니다....”라던 그의 눈빛이 흔들린다. “왜 면목 없다고 하시지요?”라고 진짜 바보같은 기자가 묻는다. 그는 소리 없이 한숨을 쉬면서 “면목 없는 거지요…….” 한다. 그게 그다. 죄가 없고 있고를 떠나 그저 세상에 미안한 마음인 그. 사람들에게 주는 실망은 둘째 치고 그들에게 주는 이 혼란만도 미안해하던 그. 이제 온 세상이 떠나는 그를 배웅한다.

 

빗속에서 4시간을 기다리면서도 아이를 안은 제 가족에게 제 앞자리를 양보하며 내 앞에 서라고 앞으로 밀며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준다. 노란 계란을 얼굴에 뒤집어 쓰던 그에게 이제 노란 비행기를 날린다. 노란 리본위에 그에게 보낼 길고도 짧은 편지를 쓴다.

 

많은 사람이 울었다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다. 우는 이들 중에는 나와 같은 자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잊힐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구의 떠남에 대해 그토록 많은 이들이 추모하는 광경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다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럽다. 존경이 귀한 우리나라다. 아까워할 인물을 찾기 힘든 우리나라다. 영국 다이애나비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을 때 그 많은 꽃다발을 바칠 대상, 그 많은 초를 켤 인물이 그들에게 있었다는 것만은 내심 부러웠다.

 

우울했던 국민정서가 그에 대한 애정으로 과장되었다 치자, 시기와 잘 어울리는 소재로 시청자의 공감을 얻어 히트하는 드라마와 가를 것이 없다고 치자.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한 인물의 죽음이 주는 메시지가 없을까. 국가 원수들에게 머리 숙인 적은 없으면서도 아이들과 전경에게는 머리 숙여 인사하고, 봉하마을을 찾은 관광객들에게 무릎 꿇고 막걸리를 따르던 그의 모습만큼은, 한참 동안 기억하고 싶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을 살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모든 사람이 미래에 살기를 원한다. 우리는 지금을 살면 안 된다. 그의 말대로 지금에 연연하면 이기적이고 영악해진다. 내가 우선 상아야 하니까 말이다. 현재에 급급하기보다 우리 모두 자신의 장례식을 떠올리며 살길 바란다.

 

떠난 그는 그런 생각도 없이 그저 그때그때 변치 않는 자신의 소신대로 살기 바빴겠지만, 이제 그를 떠나보낸 우리에게 남은 수제는 내일, 바로 나 자신의 장례식 장면을 늘 떠올리며 살아보라는 것인 것 같다. 내 장례식에서 진심으로 울어줄 이는 누구인가. 그날의 조사는 어떤 내용일까. 그렇게 미래를 준비하는 우리의 하루하루, 그 미래를 위해 오늘을 충실히 사는 우리, 내게는 그것이 그가 이렇게 홀연히 떠난 이유다. 난 그거밖에는 모르겠다. 그런데 그 하나만으로도 내게는 너무 벅차기만 하다. 나는 오늘 그렇게 그를 보낸다.

(이종선의 '멀리가려면 함께 떠나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