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글자로 외우기 : 태정태세문단세 , 예성연중인명선 , 광인효현숙경영 , 정순헌철고순 이렇게 각각 일곱자씩으로 외웁니다.
제 1 대 - 태 조(太 祖) . 휘 - 성계 (1335 ~ 1408 )
재위 기간 - 1392 ~ 1398. 왕후 - 신의왕후 한씨 . 신덕왕후 강씨,
주요 행적 및 업적 우군도통사로서 요동정벌을 위해 북진하다 위화도에서 회군 . 우왕을 폐함 전제개혁 단행 . 신진세력의 경제적 토대를 구축하여 조선(朝鮮)을 세움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漢陽)으로 천도 . 국가의 기틀을 다짐
제 2 대 - 정 종(定 宗) . 휘 - 방과 (1357 ~ 1419 )
재위 기간 - 1398 ~ 1400. 왕후 - 정안왕후 김씨 후첩 - 성빈지씨 , 숙의지씨 , 숙의기씨 , 숙의문씨 , 숙의윤씨 , 숙의이씨.
주요 행적 및 업적 사병을 폐지하여 삼군부에 편입시킴 . 하륜의 건의로 관제를 개혁 한양의 5부에 각각 학당을 설립함
제 3 대 - 태 종(太 宗) . 휘 - 방원 (1367 ~ 1432 )
재위 기간 - 1400 ~ 1418. 왕후 - 원경왕후 민씨 후첩 - 효빈김씨 , 신빈신씨 , 선빈안씨 , 의빈권씨 , 소빈노씨 , 숙의최씨,
주요 행적 및 업적 정몽주를 제거하여 신진 세력의 기반을 굳힘 1 . 2 차 왕자의 난을 평정 . 조선 제3 대 왕으로 즉위 사병 혁파 . 문하부 폐지 . 의정부 설치 . 삼군도총부 신설 등 관제 개혁 호패법 실시 . 주자소 설치 . 여진족 격파로 변방의 안정 동국사락과 고려사 편찬 . 호포를 폐지 . 의금부 설치후 근위대 신설
제 4 대 - 세 종(世 宗) . 휘 - 도 (1397 ~ 1450 )
재위 기간 - 1418 ~ 1450. 왕후 - 소헌왕후 심씨 . 후첩 - 영빈강씨 , 신빈김씨 , 혜빈양씨 , 숙원이씨 , 상침송씨.
주요 행적 및 업적 집현전 설치 . 청백리 등용 . 정음청을 설치하여 한글을 창제 , 반포함 박 연으로 하여금 아악(雅樂)을 정리 , ·장영실로 하여금 측우기를 제작 해시계 , 물시계 등 과학기구 발명 , 조세의 공평화 , 의료제도 금부삼복법 제정 명에 보내던 조골물 폐지 . 4 군 6 진 설치 . 이종무로 하여금 쓰시마 정벌
제 5 대 - 문 종(文 宗) . 휘 - 향 (1414 ~ 1452 )
재위 기간 - 1450 ~ 1452. 왕후 - 현덕왕후 권씨 후첩 - 사칙 양씨.
주요 행적 및 업적 세종의 아들로 20년간 세종을 도움 , 민의를 잘 파악 , 인재를 잘 등용 몸이 약해 적극적 정치를 못함.
제 6 대 - 단 종(端 宗) . 휘 - 홍위 (1441 ~ 1457 )
재위 기간 - 1452 ~ 1455. 왕후 - 정순왕후 송씨.
12세에 즉위 ,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겨 강원도 영월에 유배 그곳에서 죽임을 당함 , 훗날 숙종때 왕위를 추복함
제 7 대 - 세 조(世 祖) . 휘 - 유 (1417 ~ 1468 )
재위 기간 - 1455 ~ 1468. 왕후 - 정희왕후 윤씨 . 후첩 - 근빈 박씨.
주요 행적 및 업적 계유정난을 일으켜 의정부의 요인 , 김종서 , 안평대군 등을 죽이고 이어 조카 단종을 내치고 왕에 오름 , 즉위후 직계제 부활 , 유향소 폐지 , 호패제 강화 , 진관체제 실시 , 북방 개척 , 둔전제 실시 , 직전법 실시 , 많은 농서를 간행 , 국조보감 , 동국통감 등의 사서(史書) 편찬 , 경국대전을 편찬하여 법전을 제정 법화경 , 금강경 등 불경을 간행 , 대장경 필인(畢印)
제 8 대 - 예 종(睿 宗) . 휘 - 황 (1450 ~ 1469 )
재위 기간 - 1468 ~ 1469. 왕후 - 장순왕후 한씨. . 안순왕후 한씨.
주요 행적 및 업적 직전수조법 제정 , 둔전(屯田)의 민경(民耕)을 허락 재위 13 개월만에 병으로 죽음
제 9 대 - 성 종(成 宗) . 휘 - 혈 (1457 ~ 1494 )
재위 기간 - 1469 ~ 1494. 왕후 - 정현왕후 윤씨 . 폐비 윤씨. 후첩 - 명빈김씨 , 귀인정씨 , 귀인권씨 , 귀인엄씨 , 숙의하씨 , 숙의홍씨 숙의김씨 , 숙용심씨 , 숙용권씨.
주요 행적 및 업적 경국대전을 완성 반포 , 홍문관 설치 여지승람 , 동국통감 , 동문선 , 악학궤범 등을 편찬 호당(湖堂) 제도 실시하여 문화 발전에 이바지
제 10 대 - 연산군(燕山君) . 휘 - 융 (1476 ~ 1506 )
재위 기간 - 1494 ~ 1506. 왕후 - 폐비신씨 . 숙의윤씨 후궁 - 장녹수 ( 조선 4 대 요화중 한명 )
주요 행적 무오사화를 일으켜 많은 신진사류를 죽임 , 생모 윤씨의 폐비에 찬성했던 중신 수십명을 살해 경연을 중지 , 사간원 폐지 , 비정(秕政)이 극에 달하여 중종반정에 의해 폐왕됨
제 11 대 - 중 종(中 宗) . 휘 - 역 (1488 ~ 1544 )
재위 기간 - 1506 ~ 1544. 왕후 - 단경왕후 신씨 . 장경왕후 윤씨 . 문정왕후 윤씨. 후첩 - 경빈박씨 , 희빈홍씨 , 창빈안씨 , 숙의홍씨 , 숙의이씨 , 숙원이씨 , 숙원김씨.
주요 행적 및 업적 박원종 , 성희안 등의 반정으로 즉위 , 연산시대 폐정 개혁 조광조 등 신진사류 중용 , 훈구파의 반발 초래 , 기묘사화로 신진사류 숙청 신사무옥 , 삼포왜란 등으로 정국 혼란
제 12 대 - 인 종(仁 宗) . 휘 - 호 (1515 ~ 1545 )
재위 기간 - 1544 ~ 1545. 왕후 - 인성왕후 박씨.
주요 행적 및 업적 현량과 부활 , 기묘사화의 희생자 조광조 등 신원 회복 어진 정치를 하려 했으나, 병약하여 30세에 죽음
제 13 대 - 명 종(明 宗) . 휘 - 환 (1534 ~ 1568 )
재위 기간 - 1545 ~ 1567. 왕후 - 인순왕후 심씨.
주요 행적 및 업적 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 일당을 숙청 , 을묘왜변 일어 남해안 소란 여진족 침입으로 북쪽지방도 불안 , 임꺽정의 난 농사일의 편의 , 전함 건조하여 외침에 대비 , 비변사 설치 , 국방 대책 수립 , 속무정보감 , 경국대전 간행 치안 , 국방 , 문화창달 , 경제개혁 등 많은 업적
제 14 대 - 선 조(宣 祖) . 휘 - 균 (1552 ~ 1609 )
재위 기간 - 1567 ~ 1609. 왕후 - 의인왕후 박씨 . 인목왕후 김씨. 후쳡 - 공빈김씨 , 인빈김씨 , 순빈김씨 , 정빈김씨 , 정빈홍씨 , 온빈한씨. 상궁 김개시 ( 조선 4 대 요화중 한명 )
주요 행적 및 업적 이 황 , 이 이 등 인재 등용 , 화를 입은 선비들 신원 , 동서분당 임진왜란 발발 , 의주까지 몽진 , 명의 원조 이순신의 활약 , 의병들의 선전으로 왜군을 물리침 7 년의 전란 피해로 전 국토 유린 , 국가 재정 파탄 전후 복구사업을 못하고 광해군에게 양위
제 15 대 - 광해군(光海君) . 휘 - 혼 (1575 ~ 1641 )
재위 기간 - 1609 ~ 1623. 후첩 - 문성군부인 유씨 , 숙의윤씨.
주요 행적 및 업적 임진왜란중 세자로 책봉 , 영창대군 출생후 선조가 죽자 적통론을 주장한 소북파 몰락시킴 임해군과 김재남 , 영창을 역모로 죽임 , 인목대비 폐서인 시켜 서궁에 연금 이 귀 , 김 류 등 인조반정 단행 , 광해군 강화 교동에 유배 , 제주도로 이배후 죽음 재위 15년 동안 많은 서적을 편찬 간행 , 호패제 실시 명과 후금 사이에서 탁월한 양면 외교정책 실시
제 16 대 - 인 조(仁 祖) . 휘 - 천윤 (1595 ~ 1649 )
재위 기간 - 1623 ~ 1649. 왕후 - 인열왕후 한씨 . 장렬왕후 조씨 . 후첩 - 귀인 조씨.
주요 행적 및 업적 이 괄의 난 평정 , 정묘호란과 정유재란을 당함 남한상성에서 항전하다 항복 ,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볼모로 잡혀가 치욕을 당함 대동법 실시 , 양전 실시 , 총융청과 수어청 신설
제 17 대 - 효 종(孝 宗) . 휘 - 호 (1619 ~ 1659 )
재위 기간 - 1649 ~ 1659. 왕후 - 인선왕후 장씨 . 후첩 - 안빈이씨.
주요 행적 및 업적 김 육의 주청으로 대동법 실시 , 상평통보 주조 병자호란때 볼모생활의 한을 품고 은밀히 북벌계획 수립 군제 개편과 군사 훈련 강화에 주력하였으나 청의 강세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운명
제 18 대 - 현 종(顯 宗) . 휘 - 연 (1641 ~ 1674 )
재위 기간 - 1659 ~ 1674. 왕후 - 명성왕후 김씨.
주요 행적 및 업적 서인과 남인이 자의대비 상례 복상문제로 당쟁 심화 나라에 질병과 기근이 극심 , 부분적으로 대돋법과 양전 실시 동철활자 주조 , 동성통혼 금지 , 훈련별대 창설
제 19 대 - 숙 종(肅 宗) . 휘 - 순 (1661 ~ 1720 )
재위 기간 - 1674 ~ 1720. 왕후 - 인경왕후 김씨 . 인현왕후 민씨 . 인원왕후 김씨. 후첩 - 숙빈 최씨 , 희빈 장씨 ( 장옥정 : 조선 4 대 요화중 한명 )
주요 행적 및 업적 총애하던 장씨 소생 왕자의 명호를 반대한 송시열 등 서인들 유배 장씨의 모함으로 인현왕후 폐위 , 희빈으로 승격된 장씨를 왕비로 정함 장씨의 간악을 알고 복위 운동을 하던 서인을 등용 남인을 축출 , 폐비 민씨를 복위 , 장씨를 사사 대동법을 전국에 실시 , 상평통보 주조 , 북방 개척 영토회복 전개 백두산 정계비 설립 , 금위영 설치로 5 영체제 완결
제 20 대 - 경 종(景 宗) . 휘 - 윤 (1688 ~ 1724 )
재위 기간 - 1720 ~ 1724. 왕후 - 단의왕후 심씨 . 선의왕후 어씨.
병약하여 한때 노론의 주장으로 대리청정 소론의 반대로 친정 , 신임사화로 노론 완전 숙청
제 21 대 - 영 조(英 祖) . 휘 - 금 (1694 ~ 1776 )
재위 기간 - 1724 ~ 1776. 왕후 - 정성왕후 서씨 . 정순왕후 김씨. 후첩 - 정빈 이씨 , 영빈 이씨 , 귀인 조씨 , 숙의 문씨.
주요 행적 및 업적 을사처분과 같은 탕평정책 시행 , 붕당의 대립 완화 , 사치풍조 금단 이조전량 통청법 혁파로 탕평의 제도적 보장 , 탕평의 근본 학식을 얻고자 경연을 재위 52년간 3,458회 열었음 , 조선시대 최다 기록. 압슬형 낙형 폐지 , 법치체계 재정비. 농가집성 보급 , 균역법 시행 , 청계천 준설 , 신문고 설치
제 22 대 - 정 조(正 祖) . 휘 - 산 (1752 ~ 1800 )
재위 기간 - 1776 ~ 1800. 왕후 - 효의왕후 김씨 . 후첩 - 의빈 성씨 , 수빈 박씨.
주요 행적 및 업적 규장각 제도 시행 , 과거시험 대과는 규장각 통해 직접 관장 백성들의 소리를 직접 듣고자 재위 기간 100 회 이상 미행함 수원성 수축 , 천세력 편찬 간행 , 신해통공 조치 , 대전통편 편찬 제사를 거부, 가묘를 불사른 천주교인들 탄압 주장을 거부 역사상 가장 많은 서적을 저술 및 편찬한 조선시대의 황금기
제 23 대 - 순 조(純 祖) . 휘 - 공 (1790 ~ 1834 )
재위 기간 - 1800 ~ 1834. 왕후 - 순원왕후 김씨 . 후첩 - 숙의 박씨.
주요 행적 및 업적 외척의 권력에 맞서 선왕의 정책 이양 , 국정을 주도하려 노력 암행어사 파견 , 만기요람 편찬 , 국왕 친위부대 강화 , 하급 친위 관료 육성
제 24 대 - 헌 종(憲 宗) . 휘 - 환 (1827 ~ 1849 )
재위 기간 - 1834 ~ 1849. 왕후 - 효현왕후 김씨 . 명헌왕후 홍씨 . 후첩 - 궁인 김씨.
주요 행적 및 업적 순조의 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 , 많은 천주교 신자를 학살 천주교인 적발 방법 오가작통법 적용 친정 이후 삼정(三政)의 문란과 국정의 혼란으로 민생고 가중
제 25 대 - 철 종(哲 宗) . 휘 - 원범 , 변 (1831 ~ 1863 )
재위 기간 - 1849 ~ 1863. 왕후 - 철인왕후 김씨. 후첩 - 귀인박씨 , 귀인조씨 , 숙의방씨 , 숙의범씨 , 궁인이씨 , 궁인김씨 , 궁인박씨.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헌종의 뒤를 이어 즉위 , 정치에 어두었음 외척의 전횡으로 삼정 문란 , 진주, 함흥, 전주 등지에서 대규모의 반란 동학, 천주교가 급속도로 퍼짐
제 26 대 - 고 종(高 宗) . 휘 - 재황 , 희 (1852 ~ 1919 )
재위 기간 - 1863 ~ 1907. 왕후 - 명성황후 민씨. 후첩 - 귀인이씨 , 귀인이씨 , 귀비엄씨 , 귀인이씨 , 귀인장씨 , 소의이씨 , 귀인정씨 , 귀인양씨,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세력다툼 , 열강의 내정 간섭.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 , 병자수호조약 , 한 - 미, 한 - 영 수호조약 등 채결
제 27 대 - 순 종(純 宗) . 휘 - 척 (1874 ~ 1926 )
재위 기간 - 1907 ~ 1910. 왕후 - 순명효황후 윤씨 . 순정효황후 윤씨.
조선 최후의 왕 . 한일신협약을 체결 , 일본인의 한국관리 임용 사실상 국내 정치는 일본으로 넘어감 , 일본의 압력으로 한국군을 해산 황태자 일본에 인질로 잡혀감 ,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설립 허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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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종(1674년 ~ 1720년)
조선 왕조를 통틀어 당파싸움이 가장 치열했던 때가 숙종때이다. 당시 조정은 서인과 남인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숙종은 신하들의 당파 싸움을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기도 했다. 선조시대부터 시작된 신하들의 당파싸움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속에서도 계속되었다. 이러한 당파싸움에서 승리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바로 왕들이 자신을 지지하게 하는 것이었다. 숙종은 이를 이용해서 한 당파가 세가 너무 커졌다 싶으면 그 당파를 싹 몰아내고, 다른 당파로 조정을 채웠다. 숙종의 이러한 행동은 왕권을 키우는 데는 도움이 되긴 했지만, 당파들의 대립을 더욱 부채질한 측면도 있었다.
1680년 숙종은 남인을 내쫓고 서인을 불러들였는데, 이 때 서인이 남인을 강력하게 탄압하려는 노론과 그에 반대하는 소론으로 나뉘어진 것이다. 이로써 조정에는 남인과 북인, 노론과 소론 이렇게 네 개의 당파가 존재하게 되었다.
※ 당파싸움의 원인과 발생
당쟁이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선조 때 이조전랑이라는 관직을 두고 김효원과 심의겸의 대립에서 시작되었다. 이조전랑이란 직책은 비록 그 직위는 낮았으나 관리의 임면을 장악하고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래서 그 직책의 임면은 이조판서도 간여를 하지 못하였고 반드시 그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도록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김효원이 그 자리에 추천을 받았는데, 이조참의로 있었던 심의겸이 그를 권력에 아부하는 자라고 하여 반대한 일이 있었다. 그 후에 김효원의 임기가 다 되어 후임자를 물색할 때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 물망에 올랐으나 김효원이 이를 거절하여 서로간에 불화가 생기게 되었다.
그 당시 관리와 유생들은 모두 양쪽의 어느 하나에 붙어서 대립하게 되었다. 김효원의 집이 도성의 동쪽인 건천동에 있다고 하여 동인, 심의겸의 집이 도성의 서쪽인 정동에 있다고 하여 서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동서분당이 생긴 초기에는 주로 동인 세력이 커서 서인을 압도하였다. 동인에는 대체로 이황과 조식의 문인이 많았고, 서인에는 이이와 성혼의 계통이 많아서 당쟁은 학파의 대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그 후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지고,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이를 4색 당파라 부르게 되었다.
- 경종(1720년 ~ 1724년)
- 영조(1724년 ~ 1776년)
탕평책이란 신하들을 공평하게 대하여 당파 싸움을 없애고자 하는 정책이다. 영조는 탕평책으로 당파 싸움을 많이 누그러뜨릴 수 있었으나, 또한 슬픔도 맛봐야 했다. 영조가 왕이 된지 25년이 흘렀을 때, 건강이 좋지 않아 세자가 영조를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자 남인과 소론 등이 세자를 끼고 권력을 잡으려고 했다. 이에 노론도 가만있지 않았다. 당시 영조는 젊은 왕비(정순왕후)를 새로 들였다. 노론들은 새 왕비가 아들을 낳으면 세자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정순왕후에게 접근하였다. 이에 정순왕후도 노론과 함께 세자를 모함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영조는 세자를 불러들여 자꾸 꾸짖었고, 세자는 마음이 상해 함부로 행동하게 되었다. 결국에는 궁녀를 죽이는 일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이로 인해 영조는 다시 나라 일을 직접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1761년 세자가 영조 모르게 관서지방(평안도 지방)을 다녀왔다. 그러자 노론들은 관서지방에 다녀온 것은 사람을 모아 주상전하를 밀어 낼 음모를 꾸미기 위함이라고 세자를 모함하게 시작했다. 세자로 인해 다시 당파싸움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한 영조는 결국 세자를 뒤주에 꼬박 8일을 가둬 숨을 거두게 하고 말았다. 이는 영조가 당파싸움을 막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를 모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사도세자가 죽은 뒤에도 영조는 당파싸움을 뿌리뽑기 위해 더욱 열심히 노력했다.
우선 서원을 새로 짓지 못하게 하였으며, 과거시험에 탕평과를 만들어 당파에 물들지 않은 인재를 선발하려고 하였으며, 같은 당파에 속한 양반들의 자제끼리는 결혼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조선에는 군대를 나가야 하는 남자가 베를 두 필 내면 나가지 않아도 되는 법이 있었는데, 베를 두 필에서 한 필로 낮추는 균역법을 만들어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줄여 주었다. 또한 청계천 공사를 벌려 공사에 나오는 백성들에게 급료를 지급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켰던 것이다.
우리나라 정통 궁중 음식 가운데 '탕평채'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이 음식을 만든 사람이 바로 영조라고 한다. 가지각색의 재료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맛을 내는 것을 신하들에게 보여 준 다음, 이 음식 재료처럼 어우러져 정치를 한다면 나라가 더욱 발전할 것임을 신하들이 깨닫도록 하기 위해 '탕평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영조가 당파 싸움을 누르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를 또 한번 보여주는 이야기일 것이다.
- 정조(1776년 ~ 1800년)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마자 규장각을 설치하였다. 규장각을 설치하여 세종대왕대처럼 나라를 이끌어갈 젊고 깨끗한 인재를 길러내려 했던 것이다. 그러부터 4년 뒤 정조는 규장각의 힘을 크게 확대하였다. 규장각에서 승정원, 홍문관, 춘추관의 역할을 함께 수행하도록 했던 것이다. 승정원은 왕명을 출납하는 기관으로 비서실 역할을 하는 곳이며, 홍문관은 학문을 연구하는 기관이며, 춘추관은 역사를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또한 인재를 발굴하려고 했던 정조는 서얼(첩이 낳은 자식) 출신도 과감하게 등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노비를 없앨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정조의 이 같은 의지 덕에 박제가와 이덕무 같은 능력있는 학자들이 규장각에서 일할 수 있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노론, 소론 등의 당파가 없어지고, 정조의 뜻을 따르는 시파와 그에 반대하는 벽파로만 신하들이 나뉘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정조의 노력으로 새로운 학문인 실학이 크게 융성하였으며, 백성들사이에는 서민문학이 유행하였다.
※ 실학
실학은 실사구시(사실에 토대를 주어 진리를 탐구한다.), 이용후생(백성이 사용하는 기구 등을 편리하게 하여 의식을 풍부하게 하고 생계에 부족함이 없게 한다.), 경세치용(학문은 세상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정신의 학문이다. 실학은 18세기부터 크게 발전했는데, 실학자들의 관심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였다.
박지원은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과학을 발전시키고 상업을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열하일기], [양반전]같은 소설에서도 그의 이런 주장이 잘 나타나 있다. 서얼 출신인 박제가는 적극적인 무역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학의]에서 그는 나라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신분에 상관없이 능력에 따라 관리를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박지원과 박제가가 상업에 관심을 가졌다면, 정약용은 농업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여전제'를 주장했는데, '여전제'란 공동 농장을 만들어 함께 농사 짓고, 함께 분배하자는 제도를 말한다.
또한 [목민심서]에서는 관리들의 자세와 제도의 그릇된 점을 비판했다. 이러한 실학자들은 정조의 신뢰를 받았지만 이들의 주장이 나라 일에 크게 반영되지는 못하였다. 이들이 대부분 당파싸움에서 밀려난 가문출신이었거나, 서얼출신이었던 탓이었다. 또한 정조가 1800년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도 큰 원인이었다. 이렇게 양반과 학자들을 중심으로 실학이 유행했다면 백성들 사이에서는 서민 문학이 크게 유행했다.
※ 서민문학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의 소설들은 거의 18세기에 쓰인 한글 소설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백성들은 황무지가 되다시피 한 땅을 다시 일구어 냈다. 그리고 더 많은 농작물을 거두어들이기 위해 이앙법과 이모작이라는 농사법도 개발했다. 이앙법이란 볍씨를 모판에 심은 뒤 싹이 난 모를 다시 논에 옮겨 심는 방법을 말한다. 이모작이란 가을에 벼를 거두어들인 논에 보리를 심어 이듬해 봄에 거두어 들이는 방법을 말한다.
이렇게 되자 백성들 가운데 부자가 되는 사람이 생겨났다. 부자가 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양반의 신분을 사려고 했다. 때문에 돈을 써서 족보를 위조하거나, 다른 지방으로 도망쳐 양반 행세를 하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났다. 이로 인해 양반의 수는 급격히 증가했다. 숙종때까지만 해도 양반은 전체 인구의 9%였으나, 영조때 19%, 정조때는 37%, 철종에 이르러서는 70%에 다다랐다. 이로 인해 양반의 권위는 크게 떨어졌고, 백성들은 양반과 상놈의 신분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기 시작했다.
바로 이 때문에 기생의 딸과 양반의 아들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춘향전]과 같은 소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백성들의 바람은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서도 잘 나타난다. 최제우는 모든 사람은 존엄하고 평등하다고 가르쳤는데, 이러한 가르침은 백성들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또한 18세기에는 서민들만이 즐기는 문화인 판소리, 탈춤, 민화 등이 크게 발달했다.
- 순조(1800년 ~ 1834년)
1784년, 이승훈은 청나라에서 세례를 받은 직후 조선으로 돌아와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한양에 도착한 이승훈은 곧 이벽을 찾아갔다. 이들은 이듬해부터 명례방(지금의 명동)에 있는 김범우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이 모임이 곧 조정에 알려지고 말았다. 이때 다른 이들은 무사할 수 있었으나, 중인이었던 김범우는 심한 고문을 받아 병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김범우가 우리 나라 최초의 순교자로, 지금의 명동성당이 있는 곧이 바로 김범우의 집이었다고 한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이처럼 정조 대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박해는 1800년 정조가 죽은 뒤부터였다.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은 임진왜란 때였다고 한다. 이때 소개된 천주교는 종교로서보다는 새로운 학문으로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1784년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돌아온 뒤부터 천주교는 본격저인 포교 활동을 시작했다. 천주교는 우상숭배를 금지하였기 때문에 천주교 신자들을 조상의 제사를 모시지 않으려고 했고, 이 때문에 정조는 천주교를 믿는 사람에게 벌을 내렸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등극하면서 천주교 박해는 또 다른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순조는 왕위에 오를 당시 나이가 열한 살이라, 영조의 두번째 왕비인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벽파였던 정순왕후는 정조를 따랐던 시파를 몹시 싫어했다. 그런데 시파를 가운데 서는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정순왕후는 천주교의 박해는 나라의 전통을 지키는 것임과 동시에 시파를 몰아낼 수 있는 좋은 구실이라고 생각했다. 정순왕후는 1801년에만 천주교 신자 300여 명을 죽였다. 이 때 이승훈 등을 비롯한 정약용의 형제들, 청에서 온 신부 주문모 등도 죽였다. 그리고 정약용과 박제가 등이 이와 연류되어 유배되었다.
세월이 흘러 순조가 열다섯 살이 되자,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거두고 그 이듬해 숨을 거두었다. 그 뒤 순조는 장인인 김조순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다스렸다. 김조순은 자신의 친척인 안동김씨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은 안동김씨의 판이 되었다. 천주교의 박해는 정약용과 같은 인재들을 조정에서 쫓아내는데 이용되었고, 그것은 안동김씨 세력이 조정을 장악하는 결과를 낳았다.
- 헌종(1834년 ~ 1849년)
- 철종(1849년 ~ 1863년)
이 시기에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했다.
- 고종(1863년 ~ 1907년)
고종은 1852년(철종3년)흥선 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철종이 자식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고종은 12세의 어린 나이로 조선의 제 26대 왕이 되었다. 그러나 어리다는 이유로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10년 동안 나라일을 대신 맡아 돌보았다. 1866년 고종은 민치록의 딸(명성황후)를 왕비로 맞이했다. 1873년 흥선대원군을 비판하는 최익현의 상소로 대원군이 물러나자 고종은 직접 정사를 돌보았다. 그러나 강력한 왕권을 갖지 못해 주로 명성황후를 비롯한 민씨 일파의 자문을 얻어 나라일을 돌보았다.
1876년에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어 문호를 개방했고, 1881년 일본과 청나라에 각각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보내어 새로운 문물과 제도를 배워오도록 하였다. 또 같은 통리기무아문을 만들어 조정을 근대적으로 바꾸고, 일본 군사 교관을 초빙하여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만들었다. 1882년 기존의 군대가 신식 군대와의 차별 대우에 항의하여 임오군란을 일으키고 흥선대원군을 다시 불러들였다. 드러자 민씨 일파의 요청으로 청나라가 개입하여 임오군란을 진압하였고, 대원군을 청나라로 끌고갔다. 1884년에는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사흘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1894년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 혁명이 일어나자 고종은 개혁의 필요성을 느껴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다.
동학혁명의 진압을 빌미로 일어난 청나라와 일본 간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 내정 간섭을 강화하자 고종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하여 러시아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러자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고, 급기야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를 아관파천이라 한다. 그런데 러시아 영사관이 고종을 아무런 대가 없이 보호해 준것이 아니었다. 러시아는 고종의 보호를 대가로 조선의 여러 가지 이권을 넘겨달락 요구했다. 즉 광산을 개발하거나 철도를 놓을 권리 등을 자신들에게 달라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조선의 많은 이권이 서양에게 넘어갔다.
고종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광무'라는 연호를 정했다. 그리고 스스로 황제라 부르고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는 모두 조선이 자주적인 독립국가임을 세계에 알리여는 고종의 노력이었다. 아관파천 이후,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러시아였다. 1904년 2월 6일 일본은 러시아의 여순 항을 기습 공격했다. 러일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일본은 고종에게 '한일의정서'를 내밀었다. '한일의정서'는 일본이 우리 땅에서 맘대로 군사 행동흘 할 수 있도록 하고, 일본의 요구를 모조건 받아들이라는 조약이었다.
고종은 당연히 이를 거부하였으나, 얼마 못가 이 한일의정서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 이 전쟁에서 일본은 러시아를 무찌른다. 그리고 1905년 일본은 궁궐을 포위하고 '일본이 조선을 보호한다'는 내용의 문서를 내밀었다. 고종은 일본과 친일파들의 협박과 강압에 못 이겨 을사조약을 맺었고, 그 결과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기고 말았다. 고종은 1907년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밀사로 파견하여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한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려고 했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로 밀사들은 회의장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고종의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이 사건으로 고종은 강제로 폐위되고 아들 순종이 황제가 되었다.
고종은 1919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3.1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 강화도 조약
1884년(고종21년) 김옥균, 박영효 등의 개화파가 명성황후 일파와 청나라를 배격하고, 자주 근대화정책을 펴기 위해 일으킨 정변이다. 1884년 12월 4일은 우리 나라 최초의 우체국인 우정국 개국을 축하하는 날이었다.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등 급진파는 이 때 폭발물을 터뜨리고, 고종에게 청나라가 쳐들어 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일본군의 도움을 받아 고종을 데리고 피신한 뒤, 온건파 대신들을 죽였다. 이것이 갑신정변이다.
급진파는 다음 날 청나라와 관계를 끓고, 양반 제도를 폐지한다는 등의 개혁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협조를 약속했던 일본의 배반과 청나라가 군대를 이끌고 궁궐로 들이닥치는 바람에 사흘 만에 실패했다.
※ 동학혁명
1894년(고종31년)에 동학 교도가 중심이 되어 벼슬아치들의 부정부패와 일본의 침략에 맞서 일어난 혁명이다.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가혹한 수탈이 원인이 되어 전봉준의 지도 아래 고부에서 시작되었다. 동학군은 벼슬아치의 부정부채 금비와, 일본과 서양 등 외세의 침략의 반대를 내세우며, 관군을 물리치고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청군과 일본이 개입하려 하자, 정부가 제시한 12개항의 휴전 조건을 수락하고 해산했다. 그 뒤 정부에서 휴전 조건을 이행하지 않고 일본군이 들어오자 전국적인 규모로 다시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의 근대식 군대에게 크게 패했다. 동학 혁명은 비록 실패했지만 갑오개혁의 계기가 되었다.
※ 갑오개혁
1894년(고종31년,갑오년)에서 1895년까지 고종이 추진한 개혁으로 '갑오경장'이라고 부른다. 이 때 조선은 과거제도 폐지, 도량형 통일, 과부의 재혼 허용 등 정치, 경제, 사회분야의 제도를 근대적인 제도로 바꾸었다.
※ 을미사변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인 자객들이 경복궁에 기습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일본은 명성황후가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자, 조선에서 일본의 위치가 불리해졌다. 그러자 일본은 자국의 세력을 넗히기 위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사건을 게기로 전국적으로 일본을 반대하는 의병들이 일어나고, 고종 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 만국평화회의
1899년과 1907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의 건의로 네델란드의 헤이그에서 두 차례 열렸던 국제 회의다. 이 회의에서는 각국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문제를 의논하였다. 우리 나라는 1907년 제 2차 회의에 고종의 밀명을 받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이 참석하려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 순종(1907년 ~ 1910년)
이 시기에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사법권을 빼앗기고 군대를 해산하게 된다. 1910년엔 한일합방이 일어나 일본의 무단통치 또는 헌병경찰이 조선을 통치하게 된다. 토지조사령을 실시하여 조선의 농토를 빼앗는다. 1919년엔 3.1운동이 발생하고 이후 문화통치로 바뀌게 된다.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설치하고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등 독립군의 항쟁이 계속되고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일본과 지주에게 맞선다. 1937년엔 중일전쟁이 발생하고 이를 계기로 조선을 군사기지화 하고 민족말살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1945년 2차대전에서 일본이 연합군에게 패함으로써 조선은 해방을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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