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삼매경

[스크랩] 서평-들어라 청년들아

by 칠면초 2009. 2. 20.

 


[ 도서 ] 들어라 청년들아
정과리 | 사문난적 | 2008/10/20
평점
상세내용보기 | 리뷰보기(2) | 관련 테마보기(0)


첫 장을 펼쳤을 때 “삶은 살만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숨이 턱 막혔다. (그렇다고 ‘탁’치는 ‘억’ 하더라는 아니지만)

뉴스는 연일 철면피 살인마를 보도하고, 시골 학교의 승리라고 까지 보도된 학력평가 결과는 어이없는 거짓말인 세상. ‘카드빚’에 ‘떳다방’이 신문의 시회면을 장식하는 요즘. 거기다 경제가 어렵다고 하더니 이젠 돈을 쓰라고 하며 은행에서 기업에 돈을 주지 못해 안달이라는 보도를 접하며, 혼돈의 세상에 진정 “삶은 살만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골똘히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들어라 창년들아’는 지난 10여 년간 우리 사회의 문제적 현상들에 대한 글들을 모은 책이다. 참으로 읽기 쉽게 편하게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저자 정과리 씨는 오늘날을 '고비에 오른 총년시대'라고 정의한다. 우리 사회에서 청년은 늘 변혁의 주체로서 작동했다. 민주화 과정에서 온몸을 던져 뜨거운 가슴으로 저항한 것도 그들이었고, 2000년대 이후 거리의 응원문화를 주도한 것도 그들이었다. 젊은이들의 이러한 역동성이야말로 새로움에 대한 표상으로 기능한다.

 

하지만 저자는 2008년의 대통령 선거가 청년시대의 가을이 왔음을 알리는 신호라 얘기한다. 청년의 열정이 뽐내는 깃발로 전이되었을 때, 청년의 정신세계는 눈앞의 물욕으로 들끓게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이제 아무도 ‘민중’이라는 말을 입에 꺼내지 않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민중 혹은 민중주의는 부활했다. 자발적 집단성, 즉 자발적이라는 확신에 지배되는 집단적 정서와 사유와 행동이 구가의 방향을 주도하는 것 그것이 민중주의라면 그것은 오늘날 한국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언어다.(55p)

 

합리성에 대한 이해와 사유가 빠진 맹신, 혹은 도구화된 합리성은 늘 위험하다는 것이다. 결국 지은이가 청년시대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강조하는 것은 성숙한 시민의식이다. 달리 말하면 성인의식이 그것이다.

 

지난 10여 년간 우리 사회의 문제적 현상들에 대해 틈틈이 모은 이 책은 모두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다혈증의 사회’, ‘노는 문화에 운율을’, ‘교육의 인프라를 위하여’, ‘포스트 휴먼을 기다리며’, ‘고전을 읽어야 할 절박한 이유’ 등이 그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다분히 계몽적이고 그만큼 교육적이다. 그래서 약간 튕겨나가고 싶은 마음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저자가 애초부터 그러한 집필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지은이 특유의 분석틀이, 언어에 대한, 혹은 그 언어의 반성적 기운이 저자의 생각을 그쪽으로 몰아갔을 것이다.

 

한편 생각하면 작가의 산문 ‘문화읽기’는, 보다 사회적이며 보다 실감 있는 주제를 건드리는 것이어서 그만큼 구체적일 수 있다 생각도 들게 한다.

그 실례로 책은 제목에서 주는 딱딱함을 벗어나 참으로 편하게 다가온다. 우선 1장인 ‘다혈증의 사회’에서는 우리 사회의 병적 증상에 대해 진단한다.

 

차를 몰고 가다보면 담뱃재를 차창 밖으로 터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차 안에 재떨이가 없기도 하리라......그 운전자는 담배꽁초를 차 안에 잠시도 두지 못하는 청결주의자이다. 헌제 진정한 청결주의자라면 담배를 끊어야 하지 않을까? 그는 ‘더러운 청결주의자’인 것이다. (57p)

 

개인과 집단의 문제를 다루면서 진정한 ‘민주주의 길’이 무엇인지에 대해 탐구한다. 시민의식의 부재는 위정자들을 점점 더 뻔뻔해지게 하고 시정잡배들은 날로 더 기승을 부리게 만드는 원인이다.

그것이 청년들의 ‘노는 문화’에도 영향을 끼친다. 여기부터가 2장이다. 사람들이 왜 말해야 할 데서 말하지 못하고 침묵해야 할 데서 다변에 빠지는지를 살핀다.

 

자발적 침묵을 강요받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는 누구나 자유롭게 의사를 표명할 수 있고 그래도 전혀 위험하지 않은 것이다. 말의 문화가 좀더 성숙해 지기위해서는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이 스스로의 명예에 누가되지 않아야 한다(96p)

 

혼란한 사회가 ‘노는 문화’에 영향을 끼치고 이는 다시 ‘말의 문화’에도 영향을 끼친다. 정치적 혼돈으로 인해 봉쇄된 욕망이 “시시콜콜한 잡사 쪽으로” 몰려들 수밖에 없게 된 연유다. 그러다보니 연예인이나 명사들에 대해서만 관심을 보이는 무기력한 자유에 함몰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대상을 추상적인 ‘우리’로부터 ‘나’ 자신에게로 돌려야 한다. 세계의 불행을 ‘남의 탓’으로 돌리기 전에 ‘나의 탓’으로 보고 정직하게 수용하는 것이 사태를 개선하는 첫걸음이라는 것이다.

교육의 인프라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러므로 대단히 중요하다. 이 부문을 다루는 것이 3장이다.

 

저자는 모든 대학입시를 논술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만이 주입식 교육의 병폐를 해소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생각하는 공부’가 아닌 공부를 왜 해야 하는가? 지식과 생각은 같은 자리에 놓여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산지식이 되고 이러한 산지식이 체질화할 때 사회의 개선 또한 빠르다.

 

장기적 전망은 생각도 않고 눈앞의 문제만을 그것도 획기적으로 해결하려고 용쓴 교육관계자들의 근시안적 근본원인이다(151p)

 

4장의 ‘포스트 휴먼을 기다리며’는 너무도 생생한 정보 과잉이 사회의 악몽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옛날의 사람들은 가고오고 쏘다니며 만났다. 요즘 사람들은 안방에 앉아서도 만난다. 시시각각으로 만난다. 방방곡곡에서 만난다. 혼자 있는 시간은 이제 말소되었다. 덕분에 고독해질 일도 없다. 그런데 왜 만나는가?한때 연어처럼 귀하고 소중했던 정보가 이제는 감자처럼 흔하고 당연한 것이 되었다 (189p)

 

5장의 ‘고전을 읽어야 할 절박한 이유’ 또한 비슷한 연장선상에 있다. 고전은 “강제로라도 읽어야” 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것도 일찍부터 읽어야 한다. “고전은 지식의 보고가 아니라 지식의 장수 유전자가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교육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병중에 있다는 반증인 셈이다.

 

고전은 지식의 보고가 아니라 지식의 장수유전자가 잘 모여 있는 곳이다. 고전은 생각의 촉매들이다(236p)

이쯤에 와서 작가는 다시 질문 던진다. 아직도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지은이는 스승의 물음을 되새기며 곱씹는다.

결론은, 삶은 ‘살만한 것’이고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모든 존재의 당위이다. 과연 이 부동의 진실 앞에 우리들은 얼마나 충직하게 눈 부릅뜨고 있는가? ‘들어라 청년들아’가 질문하고 있는 포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때 청년들이었거나, 현재 청년이며, 앞으로 청년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출처 : 부평사람들기자
글쓴이 : 이혜선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