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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채봉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감동의 50%는 가지고 갈 수 있다. 깊은 울림이 있는 문체로 어른들의 심금을 울리는 그의 유고 수필집 ‘나, 내가 잊고 있던 단 한 사람’은 그동안 잊었던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만들어주었다.
정채봉은 1998년 말에 간암이 발병했다. 죽음의 길에 섰던 그는 투병 중에도 손에서 글을 놓지 않았으며 그가 겪은 고통, 삶에 대한 의지, 자기 성찰을 담은 에세이집 ‘눈을 감고 보는 길’을 펴냈고, 환경 문제를 다룬 동화집 ‘푸른 수평선은 왜 멀어지는가’, 첫 시집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를 펴내며 마지막 문학 혼을 불살랐다.
난 그와 비슷한 삶을 살다 간 한 시인을 알고 있다. 그분은 살아있는 동안 참으로 가난했지만 영혼만은 가장 부자였던 사람. 그도 죽음의 시간을 받아두고 수십편의 유고 시를 남겼다.
평생 소년의 마음을 잃지 않고 맑게 살았던 건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사람과 사물을 응시하는 따뜻한 시선과 생명을 대하는 겸손함을 글로 남긴 채 두 사람은 동화처럼 눈 내리는 날 짧은 생을 마감했다.
마해송, 이원수를 잇는 창작동화의 큰 산맥이었던 정채봉. 특히 이번 선집은 살아생전 그가 새롭게 시도한 ‘성인들을 위한 동화’ 시리즈에서 뽑은 주옥같은 문장과, 그만의 진솔함이 묻어나는 에세이를 함께 묶었다.
우리는 쉽게 ‘나’를 놓고 살아간다. 본연의 자아를 찾기보다는 세상에 비춰지는 나를 신경 쓰며 하루를 보낸다. 얼마 전 나를 향해 편지를 썼다. 솔직해 질 줄 알았던 그 편지도 자꾸만 타인을 의식하고 있었다. 더 이상 솔직해질 수 없는 사회, 그 속에서 정채봉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조금은 솔직해질 수 있어 행복하다. 본문 당신의 극장은 마음이 처연해진다.
'극장에서 ‘당신’이라는 연극이 상연된다고 했다. 그는 안내자에게 물었다. “주연은 누구입니가?” “당신이지요” “뭐라구요? 저라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왜 진작 알려주지 않았습니까? 연습을 하고 나왔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 연극에는 연습이 없습니다” “몇 번 상연하나요” “단 한 번 뿐입니다” “앙코르 공연도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누가 그런 명령을 내립니까?” “신이지요” -38P-
한번 인 인생, 그걸 남이 아닌 내가 만들어가야 한다. 정신보다는 물질이 더 요구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앞만 보며 뛰어가야 한다. 현실에서 무미건조함이 계속되면 쉽게 우울증이 생기고, 결국 사회에서 도피하고 싶어진다. 자신은 물론 세상을 바라보는 눈 또한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작가는 앞모습보다는 뒷모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았다. 내 모습, 사회적인 위치보다는 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일생 동안 자아와 세상에 대한 따뜻한 눈을 가졌던 정채봉 작가의 글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원한 오아시스처럼 다가갈 것이다. 내가 만들어가는 내 뒷모습은 무슨 색으로 채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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