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치열한 삶이다. 나무는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고 오로지 우리에게 잎과 열매, 그리고 목재를 주며 본연의 몫을 다한다. 또다른 매력은 단순함과 질박함이다. 나무에 가까이 가서 껍질과 잎을 보면 군더더기가 없다. 어떤 나무는 꽃을 화려하게 피우지만 그것은 열매를 맺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나무와 같은 사람. 그러한 청년을 만났다.
“사랑때문이다. 내가 현재 존재하는 가장 큰 밑받침은 인간을 사랑하려는 못난 인간의 한 가닥 희망 때문이다. 이 땅의 민중이 해방되고 이 땅의 허리가 이어지고 이 땅을 사람 사는 세상이 되게 하기 위한 알량한 희망, 사랑때문이다. 나는 우리를 사랑 할 수밖에 없고 우리는 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사랑 때문이다 중 1988년 3월18일 조성만 열사의 일기장에서)
송기역의 ‘사랑때문이다’는 1988년 5월 15일, 한반도 통일, 미군 철수, 군사정권 퇴진, 서울올림픽 남북 공동 개최 등을 요구하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할복 투신한 조성만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결코 가벼운 심정으로 책을 읽을 수는 없었다. 한 청년의 절규가 20여년이 흐른 지금도 같은 절규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두 가지다. 88년 그 시절을 확실하게 기억하고자 함과 세례를 받으며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책은 첫 장부터 가슴을 쿵쾅거리게 만들었다.
1988년 5월15일 청년은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삶이 가식적이었다는 걸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옳은 것은, 옳게 체화할 수 있는 자신의 점검이 우선이어야 한다는 것인데 내가 보여주었던 모습들은 가식의 모습이었다."
열흘 후 청년은 유혈이 낭자한 모습으로 서울 명동성당 교육관 앞에 싸늘한 주검으로 누워 있게 된다. 한반도 통일, 미군 철수, 군사정권 퇴진, 올림픽 남북 공동개최를 외치며 할복·투신한 조성만 열사다.
도대체 1980년대의 시대정신과 지금의 그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조성만 열사는 대답한다. "사랑 때문이다. 내가 현재 존재하는 가장 큰 밑받침은 인간을 사랑하려는 못난 인간의 한가닥 희망 때문이다."
첫 장을 넘기면 검은 바탕에 흑백사진이 무언으로 메시지를 전한다. 조성만열사의 서울대학 입학사진부터 평범한 학창시절 사진이 펼쳐진다. 씨름과 야구를 즐기는 청년은 잠시 후 투쟁 속으로 들어가더니 급기야 명동성당에서 투신하는 현장 사진까지. 가슴이 답답해왔다. 몇 장의 사진과 그의 추모비를 보고나서 일주일이 지나서 책을 손에 들었다.
세례를 준 문정현 신부는“조성만을 자신이 영세를 주었지만, 조성만은 통일의 스승으로 자신의 가슴속에 늘 살아 있고, 14년 전에 열사가 주장한 내용은 진정 옳은 일이며, 현재에도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반미운동과 민주화운동에 매진하고 있다”며 추모식에서 울먹였다. 책 마지막 그의 유서는 더욱 안타깝게 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내가 잊지 말아야 할 기도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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