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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삼매경

[서평]왕의 여자

by 칠면초 2011. 7. 11.

 

 

우리 500년 조선 역사 속 27인의 왕 옆에는 36인의 왕후(후궁 출신 4인 포함), 101인의 후궁, 그리고 통계조차 낼 수 없이 수많은 궁녀가 있었다.


김종성의 ‘왕의 여자’에서는 왕후, 후궁, 궁녀의 기원, 자격, 선발 과정, 인원, 직무, 품계, 사랑, 출산 등을 각종 표와 통계를 통해 소개한다. 마치 그 시절 직급을 보는 듯해 흥미진진하다.


실제로 정식 궁녀는 ‘나인’이라고 한다. 나인은 격일제로 근무했으며, 12시간을 일한 다음에는 36시간을 쉬었다. 이렇게 많은 여가 시간을 궁녀들은 궁체라고 하는 글씨연습을 하거나 투호 등의 놀이 또는 바느질이나 뜨개질 등을 하면서 보냈다. 나인이 된 후 궁녀로서 최고직위인 상궁이 되려면 30년이 필요하다.


책은 4세에서 10세 사이에 궁녀로 선발되어 왕 한명에게 일생을 바쳐야 했던 궁녀, 후궁, 왕후의 모든 것을 소개한다.


보통 ‘왕의 여자 일생’ 하면 아름다운 궁녀가 우연한 기회에 왕의 눈에 띄어 데이트를 즐기고 임신을 하여 후궁을 거쳐 왕후가 되는 과정을 생각하게 마련이지만 실제 궁녀, 후궁, 왕후의 생활은 철저하게 계산된 정치의 산물이었다. 궁녀를 고를 때 일차적으로 중요시 한 점이 후보자가 아닌 그 가족들이었다는 점만을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가족과 본인에게 아무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었을 때 상궁과 색장나인이 궁 밖으로 나가 면접을 실시한다. 말 그대로 출장감정인 셈이다.


이 과정 중에서 빠트릴 수 없었던 처녀성 확인은 황당하기 까지 하다. 의녀가 앵무새의 생혈(生血)을 여자 아이의 팔목에 묻혀서 묻으면 처녀이고 안 묻으면 처녀가 아닌 것으로 판정했다고 한다. 이런 처녀 감별은 사실은 남녀가 얼마나 잘 화합하고 정답게 살지를 앵무새 피로 점쳤던 것이다. 잉꼬부부라는 말처럼 앵무새는 남녀 간의 화목을 상징하는바, 앵무새의 피가 잘 묻지 않는다는 것은 처녀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장차 남녀 간의 불화가 예상되었기에 불합격시켰던 것이다.

 

궁녀는 한 번 입궁하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근무하는 종신직이었다. 각종 의복 제작, 곤룡포의 흉배 등 각종 자수 제작, 수라 및 음식물 준비, 세숫물, 수건 등 빨래담당, 불 때기 및 촛불 담당, 침실 청소 등을 맡았다. 품계는 5품~9품까지 받았다. 한마디로 ‘하위직 공무원’이었던 셈이다.


이들의 꿈은 모두 왕후가 되는 것이었다. 왕의 자녀를 생산하고 생산한 자녀가 왕에 오르는 것이었다. 이를 모두 이룬 3명의 여인은 연산군의 모친인 폐비 윤씨와 인종의 모친인 장경왕후 윤씨, 그리고 경종의 모친인 장희빈이다. 하지만 세 명 모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자신의 자녀가 보위에 오르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 폐비 윤씨와 장희빈의 경우는 생전에 왕후에서 폐위까지 되었다.


그렇다면 한 남자만을 바라보던 궁녀의 성(性)은 어땠을까. 궁녀는 왕의 여자가 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남성과의 성관계는 법으로 엄격히 금지됐다. 이를 어길 경우 무조건 사형이었다.


결국 궁녀들이 성관계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선택은 동성애였다. 금남의 영역 속에 갇힌 궁녀들의 삶에서 동성애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행위가 아닐까?  이들은 서로 팔에 ‘붕’자를 팔에 새겨 동성애인간의 의리를 유지했다. 현재 문신의 의미와 유사하다는 점이 흥미롭다.


후궁은 ‘왕의 또 다른 부인’이라기보다는 왕후를 보좌하는 존재였다. 이런 이유로 그들에게는 법으로 규정한 품계와 함께 품계에 따른 직무가 부과되었다. 물론 후궁제도를 법으로 규정한 본질적인 목적은 궁녀처럼 일을 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왕의 첩’을 합법적으로 궁궐 안에 두기 위해서였다. 자녀 생산과 왕후 보조가 이들의 존재 이유였다. 그러한 이유로 이들을 뽑을 때는 내면과 외면을 철저히 관찰해야만 했다. 말하자면 예쁜 여인보다는 예쁜왕권이 더 소중했다는 말이다.


왕후의 권력은 왕의 사후에도 계속된다. 궁궐이 아닌 별도의 공간에서 생활했지만 왕실 최고 어른인 왕대비가 됨으로써 위상과 권력은 오히려 왕후 때보다 강화되었다. 그렇다고 ‘왕의 여자’들 생활이 그다지 화려하지만은 않았다. 철저히 유교적 여성관의 전형을 요구받은 그들은 평생을 인내하며 살아야 했다.


오직 한 사람을 바라보며 평생을 보낸 후 왕후가 되지만, 남편과의 잠자리에 자신을 제외한 최대 8명의 여인과 함께 눈을 감고 떠야 했던 삶은 어쩌면 일반 아낙보다 더 고독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