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도 화제를 낳았던 ‘청원(북스퀘어)’은 안락사라는 쉽지 않은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읽고 난 후엔 내 삶이 더욱 소중해지는 기분이다.
주인공 이튼은 잘나가는 최고의 마술사였다. 하지만 그의 성공을 시기한 친구가 꾸민 사고로 사지마비가 된 채 14년을 살았다. 인간의 기본적인 생리작용을 물론, 파리가 눈앞에서 왱왱거리며 날아다니다 코에 앉아도 그 새털처럼 가벼운 파리하나 잡지 못하고, 밤새 내리는 비가 천장에서 새 이마위로 줄기차게 떨어져도 다음 날 아침 누군가의 도움을 받게 될 때까지 곤죽이 되도록 그 빗방울을 맞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나마 12년간 극진한 사랑으로 이튼을 간호해온 소피아 덕에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희망을 주는 강연도 다니고, 책도 쓰고, 재치 있는 입담으로 라디오DJ까지 소화해 낸다. 그런 일상은 그를 지치게 한다. 특히 유머 넘치는 이튼의 입담과 코믹 에로스적인 설정은 유쾌하기 까지 하다.
하지만 유쾌함은 역설적으로 더욱 슬프다. 어느날 이튼은 자신의 의지로 1분 1초도 살 수 없는 고통스러운 삶을 끝내고 싶어 한다. 변호사이자 오랜 친구에게 청원을 한다. 그의 마지막 삶의 투쟁이자 마지막 인생 마술은 그렇게 시작된다. 소설의 시작이기도 하다.
이튼의 청원을 책임진 그의 오랜 친구이자 변호사인 데비아니와, 연인과 간호사의 경계에서 이튼을 12년째 돌본 소피아가 펼치는 냉기 어린 설전은 독자의 각기 다른 생각을 보여준다. (저자가 후기에 기록했듯이 길을 여는 것은 작가이고 그 길을 가는 사람은 독자이다. 그 길을 가며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닫는 것은 오롯이 독자의 몫이라 함)
하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이튼의 간절한 청원은 기각되어 버린다. 자신이 진행하던 라디오프로그램으로 안락사 찬반투표까지 해가며 여론을 만들었지만 삶을 이어가야 한다는 패소를 한다.
고통스러운 삶이 계속 이어져야 함에 절망하는 이튼을 바라보는 소피아는 자신의 남은 생을 감옥에서 살아가더라도 이튼의 죽음과도 같은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며 도와주겠다 말한다. 사랑하지만 그를 위해 그 앞에서는 그 멋진 다리 한 번 내놓지 않고 자신을 억눌러 가며 살았던 소피아가 그렇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 순간, 이튼은 그녀에게 청혼을 하고 마지막 하루 동안 '남편과 아내'가 된다. 그들의 애써 감춰왔던 가슴 아픈 사랑은 그렇게 단 하루를 남겨둔다.
책을 읽는 동안 애잔하면서도 빠트리지 않는 이튼의 유머에 콧등이 시큰해진다. 만약 내게 투표권을 줬다면 나는 이튼에게 한 표를 줬으리라.
“전… 저 애의 어미입니다. 저 애를 열 달 동안이나 배 속에 품었다 낳았죠. 누구보다 저 애를 사랑하고 아껴요. 하지만 저기 인생은 자기가 사는 거예요. 그 인생이 누구건데요?~그 인생은 오로지 저 애만의 것이죠.”(165p)라고 말하는 이튼 어머니의 대답은 가슴을 아프게 한다.
말하자면 '청원'은 전신마비 사나이의 사연으로 행복하게 죽을 권리를 청원한 이야기다. 딱딱하고 지루한 법정 공방을 앞세우며 논리적으로 독자를 설득하려 하기보다 감성에 호소한다. '안락사'에 대한 윤리적, 종교적, 사회적 판단 그 모든 것을 떠나 잊을 수 없는 삶과 사랑, 그럼에도 인간답게 죽을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던, 행복하게 죽을 수 있기를 바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에 오랫동안 마음이 먹먹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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