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봄 꽃샘추위는 유별나다. 꽃들이 더디 피는 바람에 벚꽃 없는 벚꽃축제가 열렸고, 봄의 전령사 개나리도 예년보다 늦게 노란 웃음보를 터트렸다. 하지만 4월의 날씨만 얄궂은 게 아니다. 심술궂은 강풍은 겨우내 정성들여 가꾼 채소 비닐하우스를 찢어 버리지만, 봄은 왔다. 봄의 아지랑이를 한보자기 풀어 놓은 일상의 사소한 사건과 사물들, 마치 한편의 서사시와 같은 언어로 손바닥에서 놓을 수 없는 이야기, 손바닥 수필이다.
책은 가볍게 술술 읽히면서도,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하는 힘이 있다. 마치 봄을 흠뻑 느낄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며칠 전 비로 가로수 벚꽃들이 후드득 꽃비를 뿌렸다. 도로에 만들어진 꽃포장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 그 길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 새 천국이다. 혹 걷다가 비에 젖은 꽃잎을 만나면 주워서 햇볕에 말리기도 한다. 나는 떨어진 꽃잎을 하나하나 세길 좋아한다. 이유는 아주 오랫동안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꽃은 떨어져도 추하기는커녕 나에게 언제나 희망이자 꿈이다.
어느 날 봄처럼 내게 온 연암서가의 ‘손바닥 수필’도 그러했다. 피천득 선생으로부터 "반짝이는 예지, 조금만 드러낼 줄 아는 자제력, 정제된 언어…"라는 평을 받은 저자의 수필집은“어떤 신이 지구를 뻥튀기 기계에 넣고 ’뻥이야!‘하고 튀겨 낸 것”처럼, 여기저기서 꽃들이 피기 시작하는 이 계절, 봄을 맞이하면서 풀어낸 글도 인상적이다.
봄 뿐 아니라 작가는 ‘술과 차’에 대한 단상에서도 차 한 잔 마시는 즐거움을 허락한다. "술은 차게 마시고 차는 뜨겁게 마신다. 찬 술은 가슴을 뜨겁게 데우고 뜨거운 차는 머리를 차갑게 식힌다. 술은 기분을 끌어올리고 차는 마음을 가라앉힌다. 집 나간 마음을 불러들여 마주 앉고 싶을 때엔 조용히 앉아 차를 마시고,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헤쳐 숨통을 틔우고 싶을 때는 여럿이 어울려 술잔을 기울인다.“ (P44)
선운사 가는 길에 느낀 ‘마음’에 대한 글에서는 인생에 대한 통찰력도 느낄 수 있다. 사실, 선운사에는 일 년 내내 꽃물결로 출렁인다.
작가 최민자가 마주한 대상들은 아주 다양하다. 보통 사람들은 무심히 지나칠 법한 것들이다. 꽃씨, 파밭, 거미, 피, 그림자, 장독, 시인들, 그리고 제주도도 소재다. 이야기에는 순서가 없다. 그냥 자유롭게 들려주고 있어 몇 장을 뒤적이다 읽어도 공감은 동일하다.
“그래, 봄이야, 봄. 봄(見, seeing)이라고! 봄에는 그저 ‘봄’만 할 일이야. 나무처럼 안으로 나이를 감추고 봄 햇살 속으로 ‘봄’ 하러 가야겠어. 느껴야 할 때 생각하고 생각해야 할 때 느끼는 얼간이 맹추 노릇 집어치우고 말이야....”
작가는 자신의 글에 대해 ‘글도 삶도 손바닥 크기를 넘지 못했다‘고 자평한다. 하지만 인생사 모든 일이 이 손바닥 안에서 있다는 생각을 하면 이야기가 단순하지만 않다. 인생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과 흔들리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유연성, 그뿐이랴 세상을 꿰뚫어보는 날카로운 예지가 곳곳에 숨어있는 이 책을 읽고 또 읽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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