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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콩속연인

[스크랩] 2009년7월18일 토요일 (보나마나 감자)

by 칠면초 2009. 7. 20.

비 그친 뒤 주말농장에 심은 감자를 캤다. 올 초에 분양받은 주말농장은 5평이 고작이다. 감자씨 열다섯 개를 놓은 게 전부다. 그러니 감자를 캤다 해봐야 한 박스도 안 나왔다. 그걸 언니네와 직장의 옛 상사 그리고 우리 집으로 나눠 봉지에 담았다. 주말농장엔 10가지 작물이 들어있다. 감자, 상추, 치커리, 열무, 얼갈이배추, 고추, 깻잎, 옥수수, 부추, 파를 마치 자식 돌보듯 남편과 수시로 드나들었다.


그래도 날씨가 순조로운 탓에 모든 작물이 잘 자라주었다. 생각하면 꼭 날씨가 순조로운 탓만도 아니다. 그거 심어놓고 무슨 큰 농사나 짓는다고 주말마다 달려가 물주고, 김매고, 바라보고 그랬다. 상추나 치커리, 열무, 배추 등은 주변 사람들이 물릴 정도로 배달을 자처했다. 친정 언니도 “네가 농사짓는 것 보니 나도 할 수 있겠다”라면서도 벌레를 잔뜩 먹은 열무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물김치를 담가 내게 건네곤 했다.


정말이지 자식 키우듯 홀홀 불며 키운 덕이다. 아직 감자 캘 때가 아니라는 옆 주말농장 할머니 말을 안 듣고 토요일 호미를 댔다. 실은 감자가 얼마나 컸을까, 그것도 무척 궁금했다. 지난 주말에 이미 캐고자 했는데 회사에서 워크숍을 가는 바람에 한 주 넘기며 장마를 맞은 게 내심 걱정스러웠다. 


“아니 그 고랑에서 감자가 꽤 많이 나왔네…” 이웃 할머니가 대견하단 표정으로 감자를 바라보는 것도 뿌듯했다. 땅을 캐면 더 나올 것 같아 난 자꾸만 호미로 땅을 긁었다.


어렸을 때 꽃씨를 뿌리면 다음날 아침부터 꽃밭에 나가 앉았다. 그러다 끝내는 못 참고 심은 씨앗을 파헤치던 추억이 있다. 아마 그래서인지 내 손으로 감자를 심었다는 건 대견스러워도 보통 대견스런 일이 아니다. 시골에서 캐던 주먹만한 감자는 아니어도 캐고 보니 제법 알이 굵었다. 그걸 한 상자 싣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예전 감자 서리 생각이 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객지인 옥산에서 살았던 나는 당시 동네 아이들과 감자서리를 했다. 옥산 보은은 지금도 자연경관이 아름다웠지만 넓은 벌에는 풀이 지천이었다. 갈대, 억새, 줄, 부들, 소루쟁이, 토끼풀, 바랭이, 고치풀, 달개비, 댕댕이덩굴 등등 없는 풀이 없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그런 풀들을 마주하고 있으면 너무나 자유로웠다. 우리를 간섭하는 사람이라곤 없었다.


그 무렵이다. 누구의 제안이랄 것도 없이 우리들은 감자 서리를 했다. 이미 정해진 일처럼 몇몇은 한창 여물어가는 햇감자를 서리하러 가고, 또 몇몇은 감자를 구울 마른 나무 조각을 주웠다. 나무를 주워와 불을 피울 때쯤이면 감자 서리를 갔던 남자 아이들은 하얗고 예쁜 어린 감자를 파가지고 돌아왔다. 여자 아이들은 그걸 받아들고 불을 지펴 그 속에 감자를 묻었다.


난 그때 감자가 그렇게 많은 열매를 땅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는 데 놀라고 감탄하고 행복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가끔 감자 꿈을 꾸곤 했다. 그런 날은 여지없이 운이 좋은 날이 되기도 했다.

 

난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내게 이런 감성을 준 건 감자의 덕이라고.... 2년의 짧은 시골생활이 내 평생의 감성을 만들어 주었단 생각이다. 발끝에 채이는 이슬을 털며 집으로 돌아올 때면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다들 마음이 차분해져 있곤 했다. 나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감자 몇 개를 씻어 가스오븐에 굽고있었다.


출처 : ♥독서클럽♥ 책으로 만나는 상생의 세상
글쓴이 : 칠면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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