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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싶은시38

백일홍 - 백승훈 - 제아무리 여름이 뜨거워도 어김없이 백일홍 꽃은 피고 석달 열흘 붉은 꽃빛에 뜨락이 환하다 꽃밭에 앉아 가만히 떠올려본다 사는 일이 캄캄하여 차라리 눈 감고 싶을 때마다 내 안을 환히 밝혀주던 백일홍 꽃 같은 그 한 사람을 시인의 마음같은 적이 언제였나 생각해본다. 어린시절 학.. 2018. 8. 17.
동그라미와 직선 /고명 지루할 거야 나무들은 꽃을 피우는 일도 그만 신물이 날 거야 해마다 다른 꽃을 피울 수 있다면야 몰라, 같은 빛깔 같은 모양 게다가 환히 알고 있는 순서 그대로 헤어지는 일에도 이골이 났을 거야 가을엔 모두를 떠나보낸다지만 잎이 떨어진 자리마다 어느새 새봄을 감춰 놓고 있던 걸 .. 2018. 8. 17.
어머니 / 호인수 집 떠날 때 들고 나온 손가방 밑창 아래 누런 갱지에 정성껏 싼 만 원짜리 열 장 어머니 당신은 그 갱지에 서툰 글씨로 밤새껏 저에게 편지를 쓰셨습니다 제발 술 많이 먹지 말고 모든 사람을 꼭같은 마음으로 대하고 무슨 일이든 앞장서 나서지 말고 남들처럼 자동차 면허증이나 하나 따.. 2018. 8. 17.
채송화 채송화 여름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꽃밭 화단 가장 앞자리에 자리한 키 작은 채송화는 바늘만한 잎으로 태양을 맞이하고 있다 미처 떠나지 못한 더위는 어젯밤 이슬 한모금으로 한 낮의 졸음을 쫒기엔 힘겨운 듯 속살 타는 아픔으로 누워있다 어머니, 내 어머니는 키 작은 채송화였다 대.. 2018. 6. 24.
당신이 보고 싶은 날은 당신이 보고 싶은 날은 -윤보영- 오늘은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그립고 맑은 날은 맑은 대로 그립더니 오늘은 당신이 아프도록 보고 싶습니다. 보고 싶을 때는 이렇게 아프도록 보고 싶은 날은 당신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움을 지나, 지금은 보고 싶.. 2018. 6. 6.
봄----신계옥 그대는 불쑥 불쑥 마음으로 들어와 얼굴 붉히는 속삭임으로 들뜨게 합니다 그런 밤이면 달빛도 더 붉고 귓볼을 스치는 바람도 부드러워서 나는 마냥 꿈길을 거닐며 잠을 놓치고 말지요 오늘은 연분홍 꽃잎에 마음을 담아 햇살속에 풀어놓았네요 느낌만으로 당신인 줄 알기.. 2018. 5. 29.
봄날은 간다/기형도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열풍(熱風)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시반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 2018. 5. 18.
괴물-최영미 괴물 최영미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 2018. 2. 14.
쉽게 쓰여진 시 쉽게 쓰여진 시 윤동주 창(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學費) 封套(봉투)를 받아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를 들으러 .. 2018. 2. 10.
연하장-김남조 연하장 김남조 설날 첫 햇살에 펴 보세요 잊음으로 흐르는 망각의 강물에서 옥돌하나 정 하나 골똘히 길어내는 이런 마음씨로 봐 주세요 연하장, 먹으로 써도 彩色(채색)으로 무늬놓는 편지 온갖 화해와 함께 늙는 회포에 손을 쪼이는 편지 제일 사랑하는 한 사람에겐 글씨는 없이 목례만.. 2018. 1. 6.
박기섭, 책 아버지, 라는 책은 표지가 울퉁불퉁했고 어머니, 라는 책은 갈피가 늘 젖어 있었다 그 밖의 책들은 부록에 지나지 않았다 건성으로 읽었던가 아버리, 라는 책 새삼스레 낯선 곳의 진흙 냄새가 났고 눈길을 서둘러 떠난 발자국도 보였다 면지가 찢긴 줄은 여태껏 몰랐구나 목차마저 희미해.. 2017. 10. 23.
우리 선생님 -김예은 파마머리 검정머리 사랑스럽고 예쁜 우리 선생님 마음 아플 때 위로해 주고 배 아플 때 낫게 해주는 우리 선생님 공부 잘했다 칭찬해 주시고 복도에서 뛰었다 혼내주시는 우리 선생님 벌써부터 생각되는 3학년이 되면 헤어지기 싫은 엄마 같은 우리 선생님 * 동심의 마음이 이렇게 맑을수.. 2017. 9. 19.
가을의 말 - 이해인 - 가을의 말 - 이해인 - 하늘의 흰구름이 나에게 말했다 흘러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흐르고 또 흐르다 보면 어느 날 자유가 무엇인지 알게 되리라 가을 뜨락의 석류가 나에게 말했다 상처를 두려워하지 마라 잘 익어서 터질 때 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면 어느 날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 2017. 9. 19.
초록-김재진 초록 - 김재진 - 벌레 우네요. 은종이 구겨지듯 가을이 열려있는 문틈에다 봉투 한 장 밀어넣네요. 살아있겠지? 자다가 나가보면 마당에 달이 훤해요. 아무도 만나지 않는 세월 초록이 남기고 간 힘으로 견디다 보면 넘어갈 수 있겠지요. *가을을 앓았던 한 시인은 여름의 풀을 베고 늘 잠.. 2017. 9. 16.
소나무에 대한 예배 - 황지우 소나무에 대한 예배 - 황지우 학교 뒷산 산책하다, 반성하는 자세로, 눈발 뒤집어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 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너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휘어지게 할지라도. 제 자세를 흐트리지 .. 2017. 9. 16.
비스듬히-정현종 비스듬히 /정현종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 엘리베이터 안 어디.. 2017. 9. 16.
그리움 죽이기 그리움 죽이기 칼을 간다 더 이상 미련은 없으리 예리하게 더욱 예리하게 이제 그만 놓아주마 이제 그만 놓여나련다 칼이 빛난다 우리 그림자조차 무심하게 차갑게 소름보다 차갑게 밤마다 절망해도 아침마다 되살아나는 희망 단호하게 한 치의 오차없이 내.려.친.다. 아뿔사, 그리움이.. 2017. 3. 27.
낙타에 대한 생각 낙타 / 신경림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 2017. 2. 22.